이광훈 공주대 만화학부 교수
이광훈 공주대 만화학부 교수
답설무흔(踏雪無痕). 눈을 밟아도 흔적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시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누구나 어렸을 적 한번씩은 읽어 봤을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경공술의 일종이다. 1970년대 골목 대본소(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곳)에서는 만화와 같이 쉽게 빌려 볼 수 있는 무협지가 있었다.

중년 성인 남자에게 무협이란 개념은 만화처럼 익숙하다. 전 세계인이 알고 있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 `드래곤 볼`은 어쩌면 현대판 무협지일지 모르겠다. `드래곤 볼`의 등장인물들이 하늘을 날며 발사하는 각종 에너지와 파워 들은 바로 무협지에서 볼 수 있는 내공술과 장풍이기 때문이다. 비록 첨단 과학 장비인 스카우트로 상대편의 힘을 측정해내고 전투의 배경이 우주의 영역으로 바뀌었다지만, 무술 연마를 통해 신체를 극대화하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무협의 세계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숨은 고수의 등장도 비슷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최고의 무공을 얻게 된 주인공 앞에는 항상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내 그동안 주인공의 노력을 일시에 무력화시킨다. 절망한 주인공은 숨겨진 비급(용의 구슬)을 통해 더 완벽한 무공을 찾아 떠난다. 무한 파워의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현실의 무술로 돌아와 보자. 종합격투기는 대부분 몇 번의 치고 받는 타격과 함께 바로 맨바닥 링에 뒤엉켜 승패를 가린다. 하늘을 날아 일격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한쪽 팔을 주고 상대방의 목숨을 가져가는 실전 칼싸움의 계산적 격투 룰이 적용된다. 빈틈을 최소화하고 웅크린 자세로 크로캅의 현실적인 발길질을 하는 것이다. 강호 무림의 메카였던 중국의 숭산 소림사는 관광객에게 수련장면을 보여주고 무술원생을 지도하는 관광 명소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그의 저서를 통해 `은거하는 고수나 도사가 있다면 잠실 운동장과 공개된 도장의 싸움판으로 나와야 한다`고 외친다. 과장된 소문을 믿지 말고 실력으로 현장에서 겨루기를 해보라는 말이다. 이해가 되는 듯 하기도 하고 동시에 실소가 나온다. 괴력난신을 무시하는 일종의 유교적 태도에서 비롯됐겠지만, 무협세계에 대한 환상을 일시에 걷어 내주는 듯해서 맥이 빠진다. 지금도 만화처럼 절벽 아래 감추어진 비급이 있고 어딘가에는 몸을 숨기고 있는 일격필살의 무예 고수들이 존재하길 마음속으로 나마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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