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창비·216쪽·1만 2000원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으로 베스트셀러 저자로 명성이 높은 소설가 은희경이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지난 2014년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이후 2년만이다.

이번에 낸 신작(중국식 롤렛)은 지난 8년여 동안 쓴 단편소설 6편을 엮은 것으로, 술, 옷, 수첩, 신발, 가방, 사진, 책, 음악 등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을 모티브로 삼았다.

중국식 롤렛은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제목으로 딴 것으로, 몰트위스키를 파는 K의 술집에서 만난 4명의 남자가 벌이는 `진실게임`이다.

라벨을 숨긴 채 세 개의 잔에 든 술을 맛보게 한 뒤 그 중 하나를 택해 동일한 가격에 주문하게 하는 주인장 K,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꽉 막힌 삶을 사는 젊은이, 가부장적 권위에 사로잡혀 있지만 실은 심약한 중년 남성 등이 불운과 행운, 잔인한 운명과 악의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남편을 두고 옛 남자에게 한번 같이 자자고 조르는 여자, 청을 받는 남자는 잠자리에 실패해 불행하고, 다른 남자는 그 여자가 마치 자신의 아내인 것 같아 불행하다. 또 다른 남자는 앞의 남자가 아내가 아닌 자기를 바라봐주길 원해서 불행하다. 이 정도면 모두 불행할 법한데, 주인장 K는 `천사의 몫`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스키가 숙성하는 동안 증발하는 2%를 `천사의 몫`이라고 부르는데, 천사가 가져가는 2%의 행운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은희경은 "이미 증발한 2%를 가지고 전체를 비관할 필요가 없다"며 "이번 작품집에서 어둡고 답답한 구석에 `빛의 웅덩이`를 그려 넣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남녀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된 `장미의 왕자`에서도 세상의 거짓과 나의 거짓, 우연과 암시, 운명과 비극을 교차시킨다. 남성 패션잡지 `GQ` 의뢰를 받아 `수트`를 소재로 쓴 작품으로 수첩과 수트, 가방의 이미지를 통해 주인공의 적막하고 불안한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정화된 밤`에선 음악을 통해 세속적인 인생에 대한 냉소를 던진다. 신발을 모티브로 삼은 `대용품`은 누군가의 불운이 나의 행운으로 치환된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존재가 다른 누군가의 삶을 대체하는 대용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던진다. 발 크기가 같다는 이유로 우연히 바꿔 신게 된 신발처럼 말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어쩌면 내가 조금쯤 변한 이유일지 모르겠다"며 작품속에 감정이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앞 작품이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고독과 상실, 두려움의 정서였다면 뒷부분에 수록된 `불연속선` 같은 작품을 통해 삶에서 반짝이는 긍정과 희망의 순간을 얘기한다. 극도의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한 여자가 직전에 비행기에 실었던 짐가방이 한 사진작가의 것과 뒤바뀌는 바람에 다시 살아나게 되는 이야기다. 작가는 6편의 소설을 통해 일상의 우연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연결돼 있는지를,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는 날들이 얼마나 공교롭게 우리를 이끄는지를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정련된 필치로 펼쳐보인다. 답답한 현실에서 크고 작은 위기와 시험에 빠질 때에 작가가 만들어 놓은 `작고 하얀 빛의 웅덩이`에 마음 편히 빠져도 좋을 듯싶다. 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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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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