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재발견 ⑭ 서천 장항 제련소

1980년대 장항제련소의 모습.  사진=서천군 제공
1980년대 장항제련소의 모습. 사진=서천군 제공
기벌포(장항읍의 옛 지명)는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로부터 15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한산 세모시와 한산 소곡주, 저산팔읍길쌈놀이 등에서 여전히 백제시대부터 이어져 온 서천 고유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금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이 요충지는 일제시대 자원의 수탈을 위한 거점지역으로 기능하면서 산업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독립이후에도 한국의 근대산업을 견인하는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군산시의 세력이 커지는 반면 장항의 산업적 기반은 미비해 도시활력을 잃고 지속적으로 쇠퇴했다. 이제 근대산업도시의 중심이었던 장항은 천혜의 생태자원을 토대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근대 산업도시로서의 성장=1920년부터 1935년까지 계획돼 추진된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1924년 옥남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장항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인 대지주들은 1923년 서천수리조합설립 인가를 받은 후 서천의 광활한 평야에서 일본으로 쌀을 유출하려는 목적으로 서천군 지역에 수리조합을 설치했다. 그 후 일제는 동부저수지, 봉선지, 서부저수지, 흥림저수지를 만들었다. 이어 장항의 옥남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장항도 일제지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제의 장항건설 목적은 장항항만을 건립해 항만을 통한 물자의 유출에 있었다. 장항의 물자유출을 위해 장항선을 부설하고 경기·강원·충남 일대의 물자를 장항항을 이용해 유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근대 산업도시 장항은 1920년 초 매립 논의가 시작돼 1929년 일본인 미야자키(宮崎) 주도의 간척지 공사와 도시계획안을 토대로 시작됐다. 1931년 8월 경남철도(현 장항선)가 개통됐고 1932년 4월에는 한국최초의 부잔교를 보유한 장항항이 완공돼 군산의 대안 신흥도시로서 각광을 받게 됐다. 이후 장항의 대표적 산업시설인 장항제련소가 1936년 6월 주요공장과 용광로 설비를 완료한 후 1937년 1월 전망산 위에 100미터 높이로 완공되었다.

장항선과 장항항 건설 후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미곡과 관련해 미곡창고, 미곡검사소, 곡물상조합등의 산업시설이 건설됐고 은행, 운송회사, 기관, 선박조합, 상옥조합 등의 상업시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관공서, 학교, 여관, 경찰서등이 건설됐으며 이러한 산업관련 시설의 건설과 함께 전등, 전화, 간이수 등의 근대적 인프라가 도시전역에 설치됐다. 이러한 도시산업화는 장항제련소 건립과 함께 더욱 가속화 됐고 산업노동자가 전국각지에서 유입됐다.

항만과 제철소, 미곡창고는 근대산업도시로서 장항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설이다.

△한국 근대산업의 대표적 상징 장항제련소=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이 팽창했던 시기, 전략물자 조달을 위해 국제결재 수단으로 금이 필요했던 일제는 금광산을 개발하고 대규모 제련소도 적소에 세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33년 흥남제련소를, 1936년 장항 제련소를 세워 조업하도록 지원했다. 1915년 건립된 최대 규모의 진남포 제련소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건식제련 시설의 하나인 장항 제련소 역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 하려는 구상 아래 건설 운영된 것이다.

장항제련소는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창설돼 원산, 흥남 제련소와 함께 3대 제련소 중의 하나였으며 아시아 최대 높이의 산업시설로 일본인들의 동제련 주생산시설로 사용됐다. 1936년 6월 주요공장과 용광로 설비를 완료한 후, 1937년 1월 전망산 위에 100미터 높이로 완공됐다. 장항 제련소는 설립당시 연간 1500 t의 소규모 제련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해방 후 계속 확장돼 1974년 1만5000 t, 1976년 5만 t 규모로 증설됐다. 해방 후인 1947년 국유화 돼 국영기업체로 운영되다 1962년 한국광업제련공사로 재설립 되었으며 1971년 민영화돼 LS에서 운영하고 있다.

장항제련소 굴뚝은 해발 210m로 한때 항해와 항공의 목표물로 쓰이기도 했고 해방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우리나라 산업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이 굴뚝은 6·25 전쟁 때는 주요기간 사업체로 공격 목표가 되기도 했고 인천상륙작전시에는 유엔군이 상륙장소를 숨기기 위해 군산 쪽에서 위장함포를 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또 9·28 수복 후에는 군산 비행장에 주둔한 미군들로부터 활주로가 짧아 비행기가 이륙할 때 걸릴 우려가 있다며 한때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 후 1979년에 일제가 건립한 굴뚝을 헐어 버리고 다시 재건축을 하여 지금도 그 옆에 흔적이 남았다.

장항지역에는 붉은 벽돌집이 많은 이유가 바로 장항 제련소 덕분이다. 제련과정에서 나오는 광석의 찌꺼기(슬래그)로 벽돌을 만들어 판매해 서천 지역에는 붉은 벽돌집 담 등이 특히 많다.

△생태문화 관광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서천=대표적 근대산업도시였다는 영광 만큼 지역활력의 쇠퇴는 큰 박탈감으로 작용했다. 장항읍의 인구는 꾸준히 줄고 전 산업분야에서 쇠퇴하고 있지만 인근 군산시는 국가산단과 새만금 개발 등 대규모 개발사업과 정주여건 개선으로 큰 발전격차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서천은 제조업이 아닌 생태문화관광도시로 재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유부도는 국내 유일의 철새 중간 기착지다. 겨울이 되면 검은머리 물떼새, 검은머리갈매기, 마도요 등이 쉬었다 가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새들이 함께 날아가는 모습은 어디서도 만나기 힘든 장관이다. 과거에는 영종도, 새만금 지역 등 철새들이 쉬었다 갈만 한 기착지가 여러 곳 있었지만 각종 개발사업으로 철새가 쉴 곳이 사라지면서 유부도는 국내의 거의 유일한 중간기착지로 남은 것이다. 국제사회 또한 유부도의 생태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장항국가산업단지 대안으로 조성된 국립생태원은 2013년 문을 열었다. 마서면 송내리 일원에 위치한 국립생태원은 한반도 생태계를 비롯해 열대, 사막, 지중해, 온대, 극지 등 세계기후와 서식하는 동식물을 한눈에 관찰하고 체험해볼 수 있다. 기후변화와 생태분야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생태시범학교 운영 등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기획전시도 운영된다.

장항읍에는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 있다. 해양생물다양성, 미래해양산업, 해양주제영상, 4D영상 등과 함께 기획전시 기능을 갖춘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전시관이다. 엄청난 규모의 `씨드뱅크`에 5200개의표본병으로 우리나라 해양생물다양성을 연출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면 노을이 아름다운 장항송림해안이 펼쳐진다. 백사장과 솔내음을 풍기는 해송림이 마음에 평안을 준다. 장항송림은 모래사장 찜질로도 유명하다. 송림은 그 앞 바다와의 사이에 1km가 넘는 백사장을 사이에 두고 긴 띠를 이루며 해변에 자리하고 있다. 송림 앞의 이 모래사장은 고려시대 정 2품 평장사 두영철이 유배를 왔다가 모래찜질로 건강을 되찾았다하여 유명세를 탔는데 이곳 모래는 염분과 철분, 우라늄 등이 풍부해 피로회복은 물론, 신경통이나 관절염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특히 이곳의 해송림은 원두막 등 휴식시설과 운동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가족단위는 물론 단체의 야외활동지로 알맞다.

송림 삼림욕장에는 기벌포 해전 전망대(장항 스카이워크)도 위치해있다. 높이 15m, 길이 250m 해송 숲 위로 가로질러 바다로 이어지는 시인의 하늘 길100m는 해송 위를 걷고 철새하늘 길 100m는 서천군에 머무는 철새에 대한 이야기길이며, 바다 하늘길 50m는 바다 위를 걷는 길이다. 최정 기자

취재협조=서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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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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