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폭력 무감각한 문화 개인의 불안·극단선택 방조 제도·구조적 예방대책 시급

한 젊은 검사가 자살했다. 검사의 자살은 사회에 큰 파장을 낳았고, 검사의 자살의 동기에 대한 조사와 책임자에 대한 질타가 연일 미디어를 가득 메웠다. 건조하게 접근하는 매체들은 과중한 업무를, 그리고 조금 더 근접한 접근을 시도하는 매체들은 상관의 폭력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범죄학 관점에서 인간의 자살은 미시적이기도 하고 거시적이기도 하다. 가장 개인적인 수준에서 원인을 찾아보면 인간이 느끼는 긴장에서 쉽게 원인을 찾는다. 이러한 긴장은 개인을 기쁘게 만들었던 다양한 긍정적인 자극의 소멸되거나, 예상하지 않았던 부정적 자극의 등장, 그리고 목표 달성의 실패와 같은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이러한 긴장을 마주하면 어떤 이는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고, 순응을 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상황을 회피하기도 한다. 상사의 물리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이라는 부정적 자극을 마주한 김 검사는 개인적 성취감등의 소멸 등이 낳은 긍정적 자극의 소멸을 경험하면서 긴장을 마주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 검사의 개인적 긴장으로만 이 상황을 치부하기에는 시원치 않은 구석이 있다. 우리 사회에 김 검사와 유사한 경험을 한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력에 무디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는 폭력에 무디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적 폭력과 성적 폭력을 모두 포함해 우리를 파괴하는 폭력 모두를 의미한다. 다양한 스펙을 기본으로 하고도 창의성, 리더십과 같은 쉽지 않은 평가기준을 통과한 새내기 직장인들이 입사 직후부터 경험하는 세계는 융통성이라는 미명하에 `견디는 자`와 `견디지 못하는 자`로 일원화된 잣대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세상이 혹독하기에 사회속의 폭력은 우리를 강하게 키우는 거름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논리를 어렵지 않게 듣게 된다.

사회의 폭력문화 담론 속에는 폭력을 가하는 자들의 논리만 가득할 뿐 피해자의 목소리는 없었다. 가해자는 장난이었다고, 가혹한 세상에 대비한 예방주사였다고 말하고, 제3자는 누구나 다 그렇다는 타자화된 논리 뒤에 숨어버린다. 불행하게도 폭력은 뇌 속에 깊이 기억되고 시나브로 학습되며 또 다른 폭력의 형상으로 변모하고 전이된다. 강한 폭력에 무뎌질수록 폭력의 학습과 전이 수준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학습되고 전이된 혹독한 폭력에 노출된 집단과 사회는 피해에 둔감하다. 인간의 오감 중에 가장 둔한 감각이 통각이라지만 우리 사회의 통각은 둔해진 지 너무나 오래된 듯하다.

사회의 통각과 같은 구실을 하는 사회제도의 혼란 상태는 자살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인간의 자살은 매우 개인적인 선택으로 보이지만 사회적 구조와 제도라는 조정자를 뒤에 숨겨 두고 있다.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 이야기했듯이 자살은 사회구조의 불안함과 사회적 아노미 현상의 반영이다. 사회적 혼돈 속에 놓인 흔들리는 개인을 구조와 제도가 지지할 수 없을 때, 기반이 취약한 이들은 쓰러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난간에 쓰인 개인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자살방지대책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이다. 구조적이거나 제도적 개입 없이, 자살을 개인적임 감성으로 해결하려고 할 뿐만아니라, 제3자들에게 자살의 원인을 타자화 시키기 때문이다.

젊은 검사는 누가 죽였나? 김 검사가 직면한 긴장만이 그 이유가 아니다. 과중한 업무를 제어하지 못하는 업무시스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 견디는 것이 적응과 동의어로 해석되는 폭력적인 조직문화, 그리고 이를 탐지하거나 도움을 줄 수 없었던 후진적 제도와 통각이 무뎌진 구성원들이 모두 방조한 것이다. 검사는 무엇을 남겼나? 안타까움을 남긴 것이 아니라 폭력의 위험성과 후진적 제도와 문화를 고발했다. 적어도 서른세 살의 젊은 검사의 이 죽음이 폭력에 무딘 우리와 제도를 향한 정치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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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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