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비리 밝히려 회계서류 빼돌렸다면 '업무상 횡령' vs '공익'

"선서. 사실을 정당하게 판단할 것과 재판장이 설명하는 법과 증거에 의해 진실하게 평결할 것을 엄숙하게 선서합니다."

1번 배심원이 대표로 선서문을 낭독하자 나머지 7명의 배심원도 모두 오른손을 들었다. 이들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곧 검사석 뒤에 마련된 배심원석에 앉았다.

평소와 다르게 방청석도 활기를 띠었다. 평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지만, 배심원의 역할을 직접 체험해보고 나름의 평결을 내리는 `그림자 배심원` 22명도 함께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날 기자를 포함한 그림자 배심원들은 사건의 공소사실·적용법조 등이 명시된 `배심원 설명서`를 검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검사측과 피고인측의 팽팽한 신경전을 바라보며 열심히 메모를 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대전지방법원 제12형사부(박창제 부장판사)는 4일 오전 11시 회사 대표이사의 횡령 혐의를 밝히기 위해 문서보관실에 보관된 서류를 몰래 갖고 나온 혐의(절도 등)로 기소된 회사 전 상무이사 A씨(42)와 이를 건네받은 전 관리과장 B씨(36)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했다. 지난 2008년 4월부터 최근까지 대전의 한 운수업체 상무이사로 근무한 A씨는 회사의 탁송료 회계 서류를 우연히 본 뒤 대표이사 C씨가 횡령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게 됐다. 그는 지난해 3월 회사 문서보관실에 있던 서류를 몰래 갖고 나왔고, 관리부 과장으로 일했던 B씨에게 이를 전달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날 공판의 핵심 쟁점은 훔친 물품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것을 뜻하는 `불법영득의사`의 여부였다.

불법영득의사가 다소 어려운 용어였던 만큼 박 재판장은 배심원단에게 예시를 들어가며 세세하게 설명했다. 이후 증인신문이 시작되자 검사·피고인측은 본격적인 공방에 돌입했다. 양측은 동일한 증인을 신청해 다양한 질문을 건넸다. 신문이 진행되는 중간 중간 배심원들은 궁금한 점을 적은 메모지를 재판장에게 전달했고, 재판장은 배심원을 대신해 증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증거물을 제시하는 서증조사에 이어 피고인 신문에 돌입하자 양측의 설전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검사측은 A씨와 B씨에게 각각 6개월을 구형했고, 변호인측은 모두 무혐의 처분을 주장했다.

검사측은 최종의견진술을 통해 "피고인들은 비위사실을 밝힌다며 공익이라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공익을 위한다는 이들의 진술에 의도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반면 변호인 측은 "피고인들은 단지 비위사실을 밝히기 위해 서류를 갖고 나왔을 뿐이며, 오히려 처벌돼야 할 것은 회사 경영진들"이라고 진술했다. 이윽고 배심원단을 비롯한 그림자 배심원단의 평의가 시작됐다. 그림자 배심원단도 특정 의견에 쏠림 없이 A씨의 행동이 불법영득의사, 혹은 공익을 위한 행위였다며 팽팽한 의견차를 보였다.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A씨와 B씨 모두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고, 재판부 역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서류를 갖고 나온 것은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목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전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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