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王 錫 글雲 米 그림

1922년 10월초 조선총독부는 당시 총독부 촉탁엽사였던 홍학봉(洪學奉)포수에게 특별지시를 했다.

조선의 각 산에서 성행되고 있던 밀렵의 실태조사를 해달라는 지시였다.

홍포수는 그 지시를 받고 경북 울진의 통고산과 일월산(日月山)의 사이에 있는 어느 산중에 도착했다.

최근 그 산중에서 어느 나무꾼 한 사람이 벼락틀에 걸려 죽은 사건의 실상을 조사하기위해서 였다.

벼락틀이란 범 표범 곰 등 맹수들을 잡기 위해 지방 사냥꾼들이 설치해 놓은 틀이었다. 그건 몇 백 년전부터 조선에서 전해 내려온 사냥법이었는데 위험했다.

벼락틀은 굵은 통나무들로 5m 너비쯤되는 뗏목 같은 것을 짜서 기와지붕 각도로 비스듬히 세워 놓고 무너지지 않게 막대기 하나로 받쳐 놓았다.

그리고 그 받침대에 돼지 대가리들의 미끼를 연결해 놓고 맹수들이 그 미끼를 물어 당기면 뗏목처럼 짜놓은 지붕이 무너져 맹수를 잡아 죽이게 되어 있었다.

그 틀에 벼락틀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 틀의 지붕이 되는 뗏목판 위에 크고 작은 돌들을 쌓아 올려 놓아 뗏목이 쓰러지면 그 돌들이 와라락 쏟아져 맹수들을 깔아죽이도록 되어 있기때문이었다.

그 돌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벼락소리처럼 울러퍼져 10리 밖에 있는 마을까지 들렸다.

벼락틀은 맹수를 잡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으나 위험하기도 했다. 맹수가 아닌 다른 짐승이 걸리는 사고는 괜찮았으나 가끔 사람들이 걸렸다.

홍포수는 그 벼락틀을 설치한 것으로 보여지는 아랫마을에 가봤다.

마을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틀을 설치한 점은 시인했으나 그 틀에 사람이 걸려 죽었다는 사실은 부인했다.

마을사람들은 그 틀에 걸린 것은 사람이 아니라 멧돼지였다고 주장했다.멧돼지가 그 틀 안으로 들어갔다가 틀에 걸려 상처를 입고 도망갔는데 죽은 나무꾼은 그 멧돼지를 잡으려다가 멧돼지의 반격을 받고 죽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주장에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틀 안에 걸어 놓았던 미끼는 돼지대가리였는데 멧돼지가 그런 미끼를 탐내 틀 안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또한 멧돼지가 그 안에 들어가려고 했어도 들어갈 수 없었다. 틀의 입구 높이가 너무 낮아서 멧돼지가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나무꾼이 죽은 원인이 멧돼지의 반격을 받았다는 마을사람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무꾼은 왜 죽었을까.

홍포수는 나무꾼이 틀 안에 미끼로 놓아 두었던 돼지대가리가 탐나 그 안에 들어 갔다가 실수를 하여 죽은 것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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