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진리·경험 알려줘야할 어른 귀찮은 부양 존재로 인식하는 현실 부모·자식다운 참모습 되돌아봐야

나는 오랫동안 10대들을 만났다. 부모에게도, 학교나 학원 선생님에게도,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비밀스런 얘기도 많이 들었다. 가족의 비밀도 접했고, 싸운 이야기, 연애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도 숱하게 들었다. 10대들이 가장 쉽게 털어놓고, 많이 하는 이야기가 부모와 얽힌 사건이다. 좋은 이야기는 별로 없다. 대부분 어디 가서 함부로 못하는 얘기들을 털어놓는다. 그 덕분에 나는 다른 집 가정사를 꽤 많이 안다. 물론 듣고 난 뒤에 나는 아무에게도 절대 털어놓지 않는다. 비밀이 지켜지리란 믿음이 있기에 10대들은 나를 만나면 속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웬만하면 10대 편을 든다. 자식들 처지에서 보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여길 만한 일들이 많고, 부모 눈으로 보면 다르겠지만 자식 처지에선 나름 타당한 불만이기 때문이다. 10대들 말을 들을 때 웬만하면 맞장구를 치지만 `엄마와 싸웠다`는 말에는 맞장구를 치지 않는다.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엄마들 하소연에 맞장구를 잘 치는데 `자식과 싸웠다`는 말을 들을 때는 마찬가지로 맞장구를 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식과 어버이가 싸웠다`는 말이 심하게 거슬리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는 말은 옳지 않다. 옛 분들은 어버이와 싸운 자식을 `패륜아`라고 불렀다. 어버이와 자식이 싸우는 집안은 콩가루 가족이다. 그런데 요즘은 진짜로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자식들은 반항이 아니라 대든다. 어버이는 야단을 치지 않고 자식과 싸움을 벌인다. 나이를 떠나서 싸움이 일어나면 어른이 없다. 권위가 없는 어버이, 어버이를 존경하지 않는 자식이 넘치는 세상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풍부한 경험과 지혜로 아래 사람들에게 인생의 진리와 경험을 들려주어 모범으로 삼을 만한 분을 어른이라 한다. 자식들에게 어머니 아버지를 존경하느냐고 물어보면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답변은 흔하지만 진심어린 존경을 표하는 자식들은 별로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존경하고 흠모하는 대상이 아니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식과 손자에게 어른으로서 살아왔던 풍부한 경험과 지혜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는다.

오늘날, 노인들은 존경받는 어른이 아니다. 훈계와 가르침을 주는 지혜로운 이도 아니다. 노인들은 변화를 따라가기도 벅찬 뒤떨어진 퇴물이다. 단지 모시고 봉양해야 할 귀찮은 짐일 뿐이다. 무자비한 변화가 노인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로, 돈 들여서 모셔야 할 짐으로 만들어 버렸다. 지혜를 가르치고, 살아오면서 쌓은 경륜으로 살아갈 길을 알려주는 노릇을 하는 노인은 거의 없다. 드라마에 나오는 대다수 노인들은 옹고집에 꼴통으로 묘사된다.

특히 부유한 집안 노인들일수록 치우친 생각에 얽매여 젊은 사람들을 억누른다. 노인들은 갈등을 해결하는 지혜를 주기보다 고집과 비밀스런 과거로 갈등을 심화시키는 노릇만 한다. 얼토당토않은 까닭을 들어 결혼을 반대하고, 어른으로써 중심을 잡지 않고 제 감정만 앞세우고, 자식과 손주들이 살아갈 앞길을 가로막기만 하는 노인들, 우리나라 드라마가 그리는 노인이다.

우리 사회엔 어른이 거의 없다. 사회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책임을 느끼고, 준엄하게 잘못을 깨우쳐 주며,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어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면 어른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준엄하게 잘못을 깨우쳐 주며, 올바른 인생길을 알려주는 어른이 없다.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한 어버이가 어른인 척하며 자식에게 그릇된 신념을 강요하고, 행동을 통제하려고만 하니 자식은 어버이에게 대들고 부모는 성질만 부린다.

그러니 자식은 `어버이께 야단 맞았다`가 아니라 `어버이와 싸웠다`고 여기고, 어버이는 `자식을 꾸짖었다`가 아니라 `자식과 싸웠다`고 여긴다.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모하고 겉만 어른인 어버이와 어버이를 존경하지 않는 자식만 남은 가정이 만들어낸 슬픈 현실이다. 박기복 책말글 연구소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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