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재발견 ⑦ 선사유적

내동리 고인돌.
내동리 고인돌.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인류역사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할 수 있고, 문자기록의 유무를 통해 둘을 나눈다.

인류의 탄생 이후 문자가 기록된 역사시대는 `선사시대`에 비하면 티끌만 한 존재다. 선사시대는 일반적으로 문자 기록이 있기 이전을 뜻한다. 인류 역사의 99%를 차지하는 선사시대는 인류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기다. 수백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의 자그마한 발전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대전 지역의 청동기시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동기 시대는 최초의 금속도구인 청동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다. 돌로 만든 도구와는 다르게 금속도구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기술의 발달도 중요하지만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금속도구만을 만드는 사람이 필요했다. 도구의 발달로 청동기 시대는 농경이 발달해 식량이 늘고 인구도 증가한다. 사회조직이 커짐에 따라 사람들의 신분과 직업도 나뉜다. 높은 신분을 가진 사회 지도자는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 군대를 거느라고 전문기술을 가진 사람을 후원해 더 큰 힘을 갖게 되는 시기다.

대전 지역의 선사유적은 아이러니 하지만 도시개발과 맞물려 있다. 대전의 대표적인 선사유적인 둔산 선사유적은 둔산 신도시의 개발로 시작됐다는 것은 대전시민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다. 둔산 선사유적지 발굴을 시작으로 대전 지역의 발굴조사가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둔산 선사유적과 같이 대규모 택지개발 지구 내 유적조사로는 송촌동 택지개발 내 송촌동 유적, 법동유적, 노은지구 택지개발 내 노은동 유적 등이 있다. 이 밖에도 각종 개발 공사 등에 따라 수많은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대전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적은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규모와 출토 유물의 수준도 높아 청동기 시대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구 둔산동, 괴정동, 유성구 궁동, 노은동, 동구 가오동 등이 있다.

괴정동 유적은 비교적 빨리 발견됐다.

지난 1967년 마을 주민이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한 유적으로 국립박물관의 수습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해방 후 한국식 동검이 출토된 무덤 유적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많은 유물이 발견돼 최대의 수확으로 평가됐다. 동검 이외에 방패형 동기, 청동거울, 동방울 등이 발견됐다. 대전선사박물관이 위치한 은구비 공원 일원에 위치한 노은동 유적은 택지개발에 앞서 조사가 실시돼 청동기 시대 주거지 14기 등이 발견됐다. 청동기 주거지 중 12기가 평면 직사각형에 돌두름식 화덕자리를 가지고 있는 이른 시기의 주거지로 대전 지역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 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전 지역이 청동기 시대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청동기 시대 돌무덤인 고인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여 있는 돌이라는 뜻의 고인돌은 한국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거대한 바위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밑에 고임돌, 묘역시설, 무덤방 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재 대전지역에서는 내동리, 대정동, 외삼동, 비래동, 송촌동, 가오동 등 전 지역에서 약 30기의 고인돌이 확인되고 있다.

또 대전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단계의 한국식청동단검이 발견된 곳으로, 그것의 문화수준도 높다. 괴정동 돌널무덤에서 나온 청동기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단계의 한국식 청동단검이 포함돼 있었으며 방패형 청동기에 새겨진 섬세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는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주조기술을 보여주고 있어 초기의 제작 중심지가 대전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구 탄방동에서 출토한 것으로 전해지는 농경문청동기에는 따비로 밭을 가는 모습, 괭이로 땅을 일구는 모습, 수확한 곡물을 토기에 보관하는 모습, 나뭇가지에 새 두 마리가 앉아있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어 당시의 종교나 생활의식, 또는 풍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자기록이 없는 만큼 당시의 시대상은 당시를 살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김기범 대전선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어느 지역이든 사람들이 살 만한 지역은 오래전부터 흔적이 남는다. 문화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으면 중심지 역할을 하게 돼 있다. 대전은 분지 지형에 강이 흐르고 있어 청동기 시대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라며 "청동기 시대 대전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지는 앞으로 연구할 문제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것으로 봤을 때 청동기 시대 전기·후기 걸쳐서 대전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전이 1905년 경부선 철도 대전역사가 문을 열면서 근대도시로서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해서 111년을 넘긴 역사가 짧은 도시라고 단정해선 안 된다고 본다. 비록 문자와 기록은 없지만 선사시대부터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였고 조선시대에는 기호유학의 한 중심지이기도 했던 회덕현의 역사를 가진, 긴 역사성을 가진 도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김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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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산동 유적 발굴당시 전경.  사진=대전시 제공
둔산동 유적 발굴당시 전경. 사진=대전시 제공
노은동 유적 청동기 시대 주거지.
노은동 유적 청동기 시대 주거지.

김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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