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를 남긴 정지용의 숨결 여전히 생생 현해탄을 그린 '바다' 그의 세계 고스란히 자연을 섬세한 글로 그리고 싶었던 참시인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
충주, 괴산, 보은 들러 옥천으로 향한 길, 국문과 학생들과 산천 답사 길이다. 속리산 세속 떠난 첩첩산중으로 들어서니 산 안에 또 산, 옛날 같으면 한 번 들어가 나오지 않으려 할 발길인 것을, 감긴 태엽이 풀리듯 산 사잇길 이리저리 돌아 옥천으로 나온다. 지용제라고 해서, 시인 정지용을 기념하는 문학제가 열리게 되어, 작은 도시는 축제 마당이다. 도착한 다음날이 부처님 오신 초파일, 속리산에도 연등이 가득 실렸는데, 같은 날 지용제 열리는 옥천에도 백포장이 줄줄 늘어섰다.

먼저 정지용의 생가로 간다. 담장 밑에 흰 불두화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시인의 집은 소박하고도 넉넉한 정감을 선사한다. 나는 생가 초가집 정원에 가만히 서서, 이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자그마한 단구의 사내가 이 나라 시를 얼마나 아름답고 세련되게 만들었던가를 생각한다. 좋은 일이다. 이런 한벽한 작은 고장의 사내가 그런 뜻 깊은 역사를 이루었고, 그를 기리는 일이 오늘까지 잊히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것. 나쁘지 않은 일이다.

정지용의 빼어난 시 가운데 누구나 알고 또 사랑하는 `향수`를 따라 생가 앞 옛날에 난 좁은 신작로 길은 향수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여기 지붕 나지막한 집들이 다소곳이 늘어서 있고, 이 집들 가운데 어느 모퉁이 집은 커피를 파는 정다운 카페가 되어 있다. 요즘은 몸이 차가워졌는지 설탕은 안 넣어도 뜨거운 커피가 좋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나는 계속해서 정지용이라는 사람을 생각한다. 유방백세라, 유취만년이라, 그는 1902년생, 그의 아름다운 이름은 백 년을 훌쩍 넘겨 오늘에 이르러 더욱 신성한 빛을 발하는 듯하다.

옥천이라. 나는 기억을 더듬어 옥천에서 난 그와 나의 희미한 인연을 추억해 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렸을 적 공주 땅에 산 적이 있다. 공주 봉황산 아래 봉황동 샘골에 살던 나는 봉황산 앞면 전체가 놀이터였다. 봄이면 진달래, 모래 부스러지는 바위, 이름 모를 분묘들, 그리고 얕은 소나무들. 그리고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도마뱀이 살았다. 도마뱀들과 나는 친구 사이, 하지만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재빠른 친구였다. 언젠가 정지용의 `바다` 연작시 가운데 하나를 읽는데, 거기에 바로 도마뱀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랐다". 그 순간 나는 즉각 내 유년 시절의 도마뱀 생각이 났다.

어린아이에게 도마뱀은 쉽게 잡을 수 없는 장난꾸러기 심술꾼이다. 잡힐 듯, 잡힐 것 같은 시늉만 내지 정말 잡혀 주지는 않는 도마뱀. 바로 그 내 유년의 도마뱀처럼 정지용의 바다,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교토 동지사 대학으로 유학 떠나며, 오가며 본 현해탄 바다는 아름답지만 어떻게 시로 옮길 수 있는지 알기 어려운 심술쟁이 장난꾸러기였을 것이다.

옥천이라면 대전에서 차로 삼십 분, 대전에서 또 공주까지 차로 사십 분 거리, 지척이다. 비록 충북과 충남이라는 자연적 지형의 차이에 따른 갈라섬이 있으나 내가 본 도마뱀이 거기 없었을 리 없다. 성장하면서 아마도 황해바다만을 겨우 만났을 지용에게 현해탄 검푸른 퍼덕이는 바다는 놀라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바다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시로 옮기고자 했고, 바다가 그에게 선사하는 놀라운 색채와 생기를 자신의 언어로 꽉 잡아 붙들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만만치 않다. 모든 놀랍고 드문 경험들처럼 정지용의 바다는 그의 시적 언어의 능력을 시험하며 그의 눈앞에서 자기 맘대로 뛰놀고 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나의 시의 언어로부터).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랐다." (내 어릴 적 함께 놀던 도마뱀들처럼).

그는 안타까운 심정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눈 앞에서 뛰노는 바다를 본다. 파란 파도, 흰 포말, 아무리 섬세한 언어로 포착하고자 해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없는 안타까운 바다. 정지용은 실로 자연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었던 참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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