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은 54회 법의 날이다. 올해도 열린 법원은 국민들과 함께하는 다양하고 의미 있는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신문에서는 국민들의 법원에 대한 신뢰도가 과거보다 낮아졌다는 조사결과를 보도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재판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의 신뢰도가 오히려 더 낮게 나타났다는 것이었고, 종전의 경향과도 다른 모습이다.

변호사로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그런 조사결과를 실감할 때가 적지 않은데, 재판을 받아 본 사람들이 간혹 드러내는 노여움이나 실망감 속에서 그 불신이 매우 구체적이고 견고하다는 것을 느낀다. 어울리는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법원이 재판당사자들의 신뢰를 충분히 얻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메아리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강원도 산골의 외딴 집에서 자랐던 나는 심심할 때면 이산 저산에 말을 걸며 놀았는데, 산들은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 듬직한 대답을 해 주었다). 근래 법원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소통하고 공감하는 법원, 경청하고 배려하는 법원, 법원은 국민속으로, 국민은 법원속으로` 등 해마다 내걸고 있는 캐치프레이즈만 봐도 그 애틋한 심정이 느껴진다. 그러나 국민들은, 특히 재판과정에서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은 그러한 노력에 비교적 냉담하고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안타깝게도 정작 법원 본연의 역할인 재판모습에서 소통, 공감 등과 다소 거리를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여전히 사건을 산더미처럼 처리해야 하는 우리의 법정에서는 짧은 시간에 꼭 필요하다는 말만 해야 하고, 그런 물정을 모르고 긴 사연을 두서없이 풀어내다가는 자칫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당사자들은 할 수 없이 간절한 말들을 종이에 빼곡하게 적어서 제출해 보지만, 판사가 잘 읽어 줄지는 걱정이고 나중에 받아본 판결문에서 그렇게 써낸 말들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없으면, 판사가 기록을 제대로 안 본 것 같다느니 다른 흑막이 있는 것 같다느니 온갖 의심을 품기도 한다. 법정에서 충분히 소통할 시간이 없는 현실에서 법원이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근간이자 매개체는 여전히 판결문일 수밖에 없다. 판결문에 적는 판결이유는 당사자들의 읍소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자 경청과 공감의 증거가 될 수 있어야 하고, 그 입증책임은 국민의 신뢰도를 높여야 하는 법원에 있다. 변호사들도 중요한 주장이나 증거에 관한 판단이 누락된 판결문을 받아 보게 되면 더 없이 힘이 빠지는데, 당사자들이 중요하게 읍소한 주장을 간과하거나 고민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은 판결은 당사자들의 걱정을 불신으로 자라게 할 수도 있다.

물론 법률전문가의 시각으로 볼 때 당사자들의 읍소 중에는 일언반구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 태반일 수 있지만, 구체적 사건마다 특별한 사연을 공감하고 당사자의 읍소에 맞춤형 메아리로 대답해 주려는 노력은 올바른 결론 이상으로 고귀한 것이다. 어느 판사가 밤늦은 시간까지 판결문을 쓰면서 `이해하기도 어려운 주장들에 일일이 답변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며 푸념하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해줘도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 판결은 당사자가 당연히 들려올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메아리와도 같은 것이다. 고춘순 법무법인 베스트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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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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