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 대전이 처음 시작할 때엔 86명의 일본인 거류민이 회덕을 피해 대전역 앞에서 좌판을 벌리면서 출발했다. 1932년 충남도청을 새로 짓고, 공주에서 선화동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근대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친일부역자인 공주갑부 김갑순(金甲淳)이 기증한 대지 6000평에 충남도청사의 설계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소속의 이와스키 센지(岩槻善之)가 시작하였으나, 1931년 사망해 동경제국대학 1년 후배인 사사 게이이치(笹慶一)가 완성했다. 지명입찰을 통해 대전에서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던 스즈키 겐지로(須須木 權次郞)가 수주하여 1932년 8월 29일 준공했다. 이후 1960년도에 3층으로 수직증축을 하게 되는데, 구조검토는 이창갑(전 충남대 총장)교수, 설계는 청구대학 정경운 교수가 수행하였다.

건물의 평면은 `凹자형`으로 평남도청과 유사하며, 많은 장식들이 없이 단순한 외관에 평지붕 형태로 주마감 재료는 스크레치타일을 사용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요소를 반영한 대표적 건물이다. 한국전쟁 때는 정부임시청사로 21일간 사용되었고, 대회의실은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도지사 공관은 대통령 숙소로 사용하였던 현대사의 핵심 공간이었다. 이 후 변형된 부분도 있지만, 처음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음에 잘 정돈하여 앞으로 영원히 시민과 함께 할 건물임이 틀림없다.

대전이 형성될 무렵 비슷한 위도 상에 있는 중국의 칭따오(靑島)도 외국인인 독일에 의해 계획됐는데, 지금까지 많은 건축물을 잘 보존하여 `중국 속의 유럽`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독일이 남기고 간 유산인 `칭따오 맥주`를 계승 발전시켰다. 군산의 경우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東國寺)`를 중심으로 원형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현장에 가보면 볼 수 있다. 우리는 몇 해 전 `산업은행 대전사옥`을 개인에게 매각하고, `영렬탑`은 일제 잔재라고 부셔버려 이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물이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공주에서 대전으로 도청 이전 후 13년 만에 해방을 맞이하고, 전쟁과 혁명을 치르는 등 모든 80년의 세월을 보낸 충남도청이 내포지역으로 떠날 때 대전은 광역시가 되었으니 당연히 떠나야 된다고 생각으로, 아무런 계획도 없이 보낸 듯싶고, 혹시 건물이 낡았다고 무조건 부신다면 원도심의 마지막 뿌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근대사 박물관이나 관공서로 설정하여 시민이 함께 소유하는 공간으로 속히 거듭나야 대전이 살아 날것이고, 우리의 마음에 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충남도청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알고 바라만 보아도, 대전의 존재감은 확실히 느낄 것이다.

유병우 씨엔유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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