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 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일생 동안 우리는 몇 켤레의 신발을 신다 버리는 것일까? 누구든지 문밖으로 들고 나면서 가장 먼저 손에 닿는 것. 그건 바로 길의 시작에서 길의 끝으로 닿는 신발의 상징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신발을 손으로 잡고 밀고 나아가다 생을 마치는 게 아닌지. 나의 어린 날 내 의지의 맨 처음 눈물은 신발 때문이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신고 싶은 신발을 어머니가 사주시지 않는다고 떼를 쓰며 울고. 그러던 어느 날에는 어머니가 그 신발을 사 오셔서 기쁘다고 감격해서 울고. 그리고 그 애지중지 신발을 누군가 고의로 바꿔 신고 가버려서는 길길이 날뛰며 울고불고. 그 다음날은 학교에도 가지 않았지. 그때는 명절마다 많은 선물 중에서도 신발 한 켤레면 모든 게 족했지.

그러고 보면 우리 생을 가장 든든하게 받쳐온 게 신발 아니던가. 그러기에 우리 조상들은 집 떠나기 전 짚으로 신을 삼아 한 짐씩 짊어지고 먼 길을 걸어간 게 아닌지. 몇 날 밤을 새워 삼은 짚신이 다 닳아버릴 즈음에서야 집으로 돌아온 게 아닌가. 그러므로 그 길은 우리 조상들이 신다 버린 신발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일지니. 더 이상 큰 신발이 필요하지 않은 시점에 우리 꿈도 더 이상 크지 않고 멈춘 게 아닌가. 시인·한남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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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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