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외제차를 몰고 클럽에 가 이성을 헌팅하는 강남 출신 20대를 지칭하는 `오렌지족`, 솔직하고 개성있는 20대를 지칭하는 `X세대`라는 단어들이 등장한 시기다. 먹고 노는 문화가 달리지면 자연스레 옷차림도 변하는 법. 스포츠웨어와 함께 캐주얼 웨어는 어느덧 한국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 들었다. 그 기세를 타고 90년대 초 게스, 캘빈 클라인, 리바이스,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등 데님을 앞세운 해외 캐주얼 브랜드들이 국내 론칭했다. 한 때 국내 캐주얼 웨어 시장의 80%를 장악했던 이들 브랜드의 독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4년 닉스와 GV2, 베이직, 스톰 등 국내 데님 브랜드가 론칭한 것. 이 브랜드들이 개성을 중시하는 신세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기세에 기름을 부은 건 1995년 10월 6일, 서태지와 아이들의 4집 컴백 무대다. 금요일 저녁 8시 MBC를 통해 한 시간동안 방영된 `컴백홈 서태지와 아이들`은 한국 최초로 아이돌이라는 호칭을 얻으며 처음 팬클럽이 만들어지는 등, 당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대중음악가의 새 앨범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절정의 인기, 절정의 영향력을 갖고 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던 만큼 이 세 명의 옷차림은 초미의 관심을 이끌었다. 4집을 관통하는 힙합 음악 콘셉트에 맞추어 서태지는 `S`로고가 찍힌 스톰 비니 모자에 스노보드복을 입었고, 이주노는 보이런던 캡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롤 오버 바지를 걸쳤으며, 양현석은 오클리 선글래스에 펠레펠레의 은색 상의와 배기 바지 차림으로 캐주얼과 힙합을 섞은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스톰 비니 모자와 보이런던 캡 모자, 오클리 선글래스는 삽시간에 품절 사태를 맞았다. 이 당시 유행의 집결지였던 서울 신촌 지역 상점들은 `태지모자`라는 팻말을 내걸고 니트 비니를 판매했고, 거리엔 헐렁한 배기 바지와 마스크 차림의 젊은이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데뷔한 이래 커다란 사이즈의 상의와 배기바지, 라벨을 떼지 않은 옷차림으로 무대에 오르는 등 당시 파격적인 옷차림으로 젊은 층에 영향을 미치며 티피코시 등의 캐주얼 웨어 브랜드 광고 모델로도 등장한 바 있던 차였다. 하지만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이들의 영향력은 가장 작품성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4집, 그리고 X세대를 대표하는 캐주얼 브랜드들과 어우러지며 거대한 시너지를 만들었다.

이선영 패션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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