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조정래 감독 귀향

소녀들의 얼굴에는 검붉은 멍자국이 가실 날이 없다. 가녀린 등에 깊게 패인 채찍 자국에는 새빨간 피딱지가 늘러 붙어있다. 그나마 생채기 하나 없는 아이는 이미 정신이 나간 지 오래다. `지옥`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끔찍한 고통을 매일같이 겪지만, 소녀들은 꼭 잡은 두 손으로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한다.

영화 `귀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지난 2002년 `나눔의 집` 봉사활동 중 강일출 할머니를 만난 조정래 감독은 강 할머니가 미술 심리치료 때 그린 작품인 `태워지는 처녀들`에 충격을 받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화는 개봉까지 무려 14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유치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침을 겪던 영화를 살린 건 세계 각지에서 보내 온 관심과 도움이었다. 영화는 7만 3164명의 펀딩을 통해 제작비의 절반인 12억원을 모았다. 크랭크 업 후 상영관 확보 등 여러 문제를 겪기도 했지만, 다행히 귀향은 개봉 첫날 예매율 1위를 기록하며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지난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첫 증언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영화 역시 김 할머니의 증언 방송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위안소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영옥(손숙)은 김학순 할머니의 방송을 보며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떠올린다.

일본군의 만행이 절정에 달했던 1943년. 경남 거창의 `한디기골`에 사는 개구쟁이 14살 소녀 정민(강하나)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게 된다. 정민은 소녀들을 태운 열차에서 영희(서미지)를 만나게 되고, 둘을 비롯한 수많은 소녀들은 이역만리에 있는 좁고 어두운 방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게된다.

이와 함께 1991년, 성폭행을 당한 후 아버지까지 살해되는 모습을 본 은경(최리)은 끔찍한 고통 때문에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결국 만신 송희(황화순)의 신딸로 들어온 은경은 송희와 알고 지내던 영옥을 만나며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는 정민과 영희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사실 모든 소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마다 사연이 있어도 결국 일본군이라는 일방적인 `가해자`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여성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들이 겪은 고통을 소녀들의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전달하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하게 가려낸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던 가해자들의 만행 역시 담담한 화법으로 풀어내며 주관적인 감정 이입을 배제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이다. 영화는 은경의 씻김굿을 통해 집에 돌아오지 못한 20만 영혼을 위로하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치유한다. 제목이 `귀향(歸鄕)이 아닌 `귀향(鬼鄕)`인 것처럼, 영화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과 이미 돌아온 소녀들을 위로하며 진정한 의미의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다. 나비나 불과 같은 상징적인 장치가 너무나도 친절하고, 후반부에 삽입된 음악과 일부 장면이 극 전체의 분위기와 다소 맞지 않는 등 사소한 연출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옥에 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주연을 맡은 어린 배우들 뿐 아니라 중견연기자들의 탄탄한 연기력은 극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깊은 감동과 배우들의 호연, 아픈 역사적 사실을 환기할 수 있다는 것만 고려하더라도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20만명의 여성이 끌려가 238명이 돌아왔다. 지금은 겨우 44분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여전히` 44분이나 남아있다. 먼 타국에 남겨진 소녀들은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영화는 우리가 지금 반드시 해결해야만 할 숙제를 조용하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로 던지고 있다. 전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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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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