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의견 강요는 폭력 진정한 소통은 경청서 시작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것이다. 불현듯 단둘이 혹은 여럿이 모인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를 흘깃흘깃 살펴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며 부러운 눈짓을 보내기도 하고, 언성을 높이는 모습엔 꼭 저래야만하나 할 때가 있다.

친구사이 혹은 연인사이 단둘이서 조곤조곤 속삭이며 마주한 이에게 집중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그자체로 아름답다. 여럿이 모여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는 자리를 지켜볼 때엔 슬쩍 끼어들고 싶어지기도 한다. 한편 흔한 풍경이 된지 오래이지만, 앞 사람을 무시한 채 모바일 화면에 빠져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기도 한다. 그럴 땐 마주한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잠시 모바일을 접어두라 권하고 싶을 때도 있다. 또한 말 한마디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일순에 망가뜨리는 경우를 목격하기도 한다.

흔히 `소통의 부재`시대라 한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진정한 소통은 어떻게 이뤄질까하는 상념이 일곤 한다. 단둘이 마주하며 대화를 나눌 때엔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상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잘 들어주기만 해도 대화는 어렵지 않게 이어질 수 있다. 여럿이 모여 있는 자리에선 어떠한가. 마찬가지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종긋 세워 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으리라.

이처럼 어렵지 않은 것이 `소통의 기술`아니던가. 그럼에도 끊임없이 소통의 단절이니 부재를 회자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소통의 기본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리라는 믿음이다.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고, 차례가 돌아오면 내 얘기를 풀어놓을 때 소통이 이루어지기에 그렇다. 결국 소통은 주고받는 것에 다름 아니다. 상대의 생각을 듣고, 나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소통의 기술인 것이다. 소통은 일방이 아닌 쌍방의 생각을 교류하는 주고받음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소통의 부재, 단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귀가 양쪽에 둘인 까닭은 듣기를 두 배로 하라"해서였다던가. 입이 하나인 이유는 듣는 것의 딱 반 만하라는 권유로 새겨본다. 말은 아끼고 듣기를 더하라는 선현의 지혜를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처럼 소통의 단절, 부재는 상대의 생각을 듣지 않고 차단할 때 비롯되는 게 아닐까. 귀는 닫은 채 나의 생각을 일방으로 강요할 때 소통은 막히고, 없어지는 게 당연지사다.

나아가 어리다는 이유로, 신분상의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종종 상대를 무시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가끔 눈에 띤다.

저마다 생각이 있고, 나름의 의견이 있음에도 사회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상대를 깔아뭉개는 몰상식이 횡행한다. 알량한 우월감을 앞세워 귀는 닫은 채, 일방적으로 입을 열며 의견을 강요한다면 소통이 아니라 폭력의 또 다른 양상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면서 소통을 운운하며 무지를 비웃고, 철없음을 한탄하는 것은 소통과는 동떨어진 불통의 세계로 치닫는다.

"내 말 좀 들어 달라" 애걸복걸한다 해서 원하는 소통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도처에서 내말 좀 들어달라는 하소연이 즐비한 요즈음이다. 잘났으면 잘 난대로, 못났으면 못 난대로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주기를 너나없이(?) 바라는 세상이다. 자격지심을 내세워 나보다 잘나서 귀를 닫고, 나보다 못나서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묵살하기 일쑤인 세상에서 진정한 소통을 찾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넘쳐난다.

예의 이상한 버릇으로 지켜본 바, 대체로 소통을 잘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남의 얘기에 귀 기울여 잘 들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다보면 말을 잘하는 이보다 묵묵히 상대를 바라보며 경청(傾聽)하는 이가 더 고귀해보일 때가 많다. 상대방의 얘기에 몰입하여 잘 들어주고, 나의 얘기를 다소곳이 건네는데 어찌 소통이 막히겠는가. 진정한 소통을 복원시키는 길은 무엇일까.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요."라는 의미를 곱씹어 되새길 때 어렴풋하나마 그 실마리를 풀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무릇 지혜는 듣는데서 비롯되고, 후회는 뱉어낸 말에서 시작된다"는 어느 현자(賢者)의 격언이 새삼 귓가에 맴돈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배로 할 때, 얻는 것이 더 많은 역설적인 미덕을 보여주는 곳이 소통의 세계이다. 말은 아끼고 듣는 것을 두 배로 하는 지혜를 터득한다면 소통은 막힘없이 이루어지고 세상이 밝아지리라는 게 관찰학습에서 얻은 교훈이 아닐까.

김영호 목원대 미술학부 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