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일 연기론, 일리는 있지만 총선 있는 해 매 번 반복된 일 미필적 고의범 정치권 자성을

나병배 논설위원
나병배 논설위원
가칭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회(창준위)가 어제 성명 하나를 내놨다. 오늘 기준으로 딱 90일 앞둔 4월 총선을 연기하자는 내용이 골자다. 국민의당 창준위 출범 나흘만에 선보인 첫 성명 키워드가 총선 연기론이라는 사실은 조금 따져볼 구석이 있다.

이 성명 내용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는 정치권에서 총선 연기론을 제기한 첫 케이스라는 점이 꼽힌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이 논제가 생명력을 얻어 살아 움직일지, 신생 정치세력의 외마디 울림에 그칠지 점치기는 어렵다. 이렇게 전망이 불투명한 현실을 무릅쓰고 문제 제기를 했다는 건 이른바 여의도 정치문법상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다른 측면은 안철수 의원의 심중과 정치 셈법이다. 국민의당 창준위에서 나온 성명, 그것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라면 안 의원의 생각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성명에서 주장한 총선 연기론과 안 의원의 견해를 등치시킨다 해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다.

성명에서 밝힌 총선 연기론의 논거는 나름대로 일리는 있다. 수사적인 문맥을 걷어내고 핵심만 추리면 "사상 초유의 무법적 선거구 실종사태가 초래됐다"는 것이고, "국민의 선택권과 정치적 약자인 정치신인의 선거운동 권리를 봉쇄했다"는 것으로 크게 무리한 주장은 아니다. 국민의당은 제도권 정당중에서 후발주자다. 더불어민주당을 뛰쳐나오는 현역 의원들의 `엑소더스`가 한창 진행중인 상황이고, 동시에 이들을 흡수해 가며 신당 창당 일정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입장이 반영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석 달 앞으로 다가온 4월 총선을 연기하는 게 타당한가이다. 심정적으로 이 주장과 논리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여론이 있겠으나 선거법상 고정값으로 돼 있는 선거일을 뒤로 물리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현 19대 국회의원 임기는 오는 5월 29일로 종료된다. 그 50일 전을 기준으로 첫 수요일인 4월 13일이 선거일로 돼 있다. 이를 연기한다는 얘기는 아무리 넉넉잡아도 한달 안팎에 불과하다. 한달 정도 여유가 생기면 성명에서 적시한대로 "거대 양당의 기득권 카르텔"이 다소 완화될지는 모르나 그로 인한 기회 비용 부분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뛰어넘기 버거운 장애도 하나둘이 아니다. 국민의당이 싸잡아 비난하는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총선연기를 위한 법 개정에 흔쾌히 동의해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이다. 양 당은 지금 어떤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쫓기는 입장이다. 총선 연기에 따른 실익은 고사하고 내부 갈등 내지는 균열 상황이 녹록치 않다. 국민의당 자력으로 총선 연기를 관철하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구조라는 얘기다. 또 선거법상 총선 연기는 대통령이 결심하도록 규정돼 있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최근의 선거 연기론이 불거진 건 지난 2014년 6월 지방선거 때이다. 3개월 전에 발생한 4·16 세월호 참사 여파로 선거를 연기하자는 일각의 주장이 제기됐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는 지방선거 한달여 뒤 7·30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예정돼 있어 통합해 치르자는 공론화 시도가 있었으나 어림없었다. 4년 더 거슬러 올라가 지난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폭침 사건 때도 정치권 일각에서 그 해 6월 지방선거 연기론이 대두됐으나 거기까지였다. 특히 건국 이후 전국단위 선거가 연기된 사례가 없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실 총선 연기 사유를 나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4월 총선에 관한 한 제도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선거구 실종 상황의 위중함을 말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에 이른 책임 측면에서 정치권은 미필적 고의범이나 다름 없다. 여야간 선거구 획정 줄다리기 행태는 총선이 있는 해마다 연출되곤 했다. 19대 총선(선거 44일 전), 18대 총선(선거 47일 전), 17대 총선(37일 전) 등을 앞두고도 양상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20대 총선일은 아무런 죄가 성립될 수 없다. 정치권의 정략과 당략이 유죄일 뿐이다.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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