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다. SNS 빅테이터 분석을 하니 올해 신조어 1위가 금수저·흙수저란다. 금수저는 돈 많은 부모, 잘나가는 부모 덕에 풍족하게 살아가는 청춘이다. 흙수저는 정반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자산 5000만 원 미만, 연소득 2000만 원 아래면 해당된다는 친절한 설명이 떠돈다. 때맞춰 흙수저 빙고게임이 나왔다. `에어컨 자체가 없음` 식으로 가난을 구체적으로 적어나가다 보면 `노력해봤자 바뀌는 게 없다`는 자괴감이 절로 든다.

한때 유행한 갑·을(甲乙)이라는 도식은 차라리 낭만이다. 십간(十干)에서 따와 순서나 우열을 가릴 때 쓰곤 한다. 거기에는 일정부분 `인정(認定)`과 `수용`의 뉘앙스가 엿보인다. 을도 갑이 될 수 있다는 여유가 배어 있다. 미생(未生)이라고 다를까. 바둑 용어에서 빌린 이 말은 완생(完生)이라는 희망의 끈과 이어져 있다. 고통스럽고 절망스런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자의식과 의지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서양 격언에서 유래한 듯한 흙수저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의 슬픈 초상이다.

흙수저가 신조어 순위 2위에 오른 헬(Hell·지옥)조선과 만나면 차원이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2030 수저계급론으로 전이되면서 어떤 발버둥에도 옴짝달싹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로 공식화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어본들 백전백패라는 절망이다. 취업을 해도 빚부터 갚아야 하는 현실에 청춘은 아프다. 은수저·동수저라는 표현에 한참 못 미치는 흙수저에는 젊은이들의 박탈감과 자조, 좌절, 반감, 분노, 저항이 농축돼 있다.

올 한해 흙수저를 금수저로 바꾼 인물이 없지 않았다. 아시안컵 축구 국가대표 이정엽 선수나 `~전해라` 패러디 신드롬의 가수 이애란이 주인공이다. 함영주 통합 KEB하나은행장도 마찬가지다. 이애란은 25년 동안 이름 없는 가수로 밤무대를 뛰었다. 논산이 고향인 함 은행장은 상고 출신이다. 내내 비주류의 길을 걸었지만 파부침주(破釜沈舟) 정신을 잃지 않았다. 살아 돌아갈 기약없이 죽을 각오로 싸워 오늘에 이르렀다. 연봉 1500만 원을 받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있다. 그는 대우증권 인수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뒤 "이병철·정주영처럼 불가능에 도전하겠다"고 외쳤다. 그러니 흙수저도 일어설 수 있다고?

2030의 눈높이와 맞지 않는 주문일 수도 있겠다. 사실 슈틸리케호의 황태자 이정엽은 연령별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그저 그런 2류 선수였다. 흙 속의 진주를 발굴한 건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었다. 이정엽은 즉각 축구계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특히 헌신적이고 겸손한 자세가 강점으로 작용했다. `줄탁동기`가 던지는 교훈이다. 병아리와 어미닭의 교감과 노력이 있어야 알에서 깨어나는 법이다.

희망의 사다리가 필요한 이유이자 증거다. 동기부여도, 인센티브도, 패자부활전도 없으니 도전과 혁신의 창업에 뛰어드는 젊은이를 찾기 어렵다. 학생창업네트워크의 최근 조사결과 우리나라 대학생 10명 중 9명은 "창업할 생각이 없거나 실패할 가능성이 큰 무모한 도전"이라고 답했다. 지원은커녕 정치권은 노동개혁 5법 처리를 뭉개고, 노조는 기득권을 반톨도 내려놓지 않는다. 이러다가 `생존을 결정하는 건 전두엽(지능) 색깔이 아닌 수저(계급) 색깔`(서울대생의 유서)이라는 인식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갈까 걱정스럽다.

을미년 마지막 날, 엘리자베스 토마스의 소설 `세상의 모든 딸들`을 떠올린다. 구석기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혹한 자연과 환경을 배경으로 짧지만 치열했던 여인네의 가녀린 삶을 그렸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라는 여주인공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절대약자였던 여성은 그렇게 투쟁하며 조금씩 커왔다. 맞서 싸우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금수저가 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수다. 이정엽이 흙수저라고 한탄만 했다면 `군데렐라`로 탄생할 수 있었을까. 병아리가 알 속에서 쪼아대지 않고선 새 세상을 만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땅의 모든 흙수저들에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되어질 수 없다"는.

송신용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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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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