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퇴근 시간은 몸도 마음도 바쁘다. 해가 짧아서도 그렇지만 오늘처럼 눈이 오려고 하는 날엔 더욱 그렇다. 바쁘게 들려오는 휴대폰 벨소리엔 끈끈한 정이 묻어나온다.

"오랜만입니다. 오늘 저녁 함께 합시다"

"감사합니다. 먼저 연락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스럽고 설레는 마음으로 난, 어느새 20여 년 전 어설픈 걸음마를 배우는 교사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교직 생활의 고비 때마다 챙겨주시는 인생의 선배이자 스승이신 분.

그 분과의 인연은, 시골학교 담임교사로, 두 아이의 엄마로, 1인 4역의 버거움에 파김치가 되어있을 때 시작됐다. 삶의 무게로 처진 어깨를 따뜻한 한 잔의 차로 가볍게 해주셨던 그 분은, 시인이신 교장선생님이시다.

매주 월요일이면 도서관이자 전교생의 모임 장소인 다목적실엔 알록달록 달콤한 막대 사탕과 꽃향기 서너 종지만큼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100여 명의 전교생과 교원들이 함께 듣는 세계 문학과 예술 이야기, 위인들의 영웅담은 학생들에겐 세계와 소통하며 미래를 꿈꾸게 했고, 교사들에겐 작은 것의 소중함에 감동하는 사랑의 힘을 주셨다. 베레모를 멋스럽게 쓰시고, 오르간을 연주하며 `섬집 아기`, `따오기`를 아이들과 즐겨 부르셨던 교장선생님. 그래서 교장실은 언제나 꼬마 손님들로 북적거렸고 웃음 가득한 사랑방이었다.

교장선생님은 20여 년 전, 학교의 최고 경영자로서 가야할 길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일까 오늘은 뜨끈뜨끈한 청국장을 앞에 놓고 `감사히 받은 것은 또 다른 이에게 감사히 되돌려 줘야 합니다`라는 말씀으로 큰 선물을 주신다. 구수한 청국장에 밥 한 그릇을 뚝딱하고 나온 거리엔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무언의 손사래를 하시며 서서히 멀어져가는 교장선생님의 뒷모습과 눈길 위의 반듯한 발자국을 보니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만년에 가장 즐겨 쓴 휘호 시 한편이 생각난다.

踏雪野中去 (답설아중거 ) 눈 내린 들판을 걸을지라도.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모름지기 어지럽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나의 발자국이.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민명선 공주 호계초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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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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