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자란 두 그루의 고목 그늘 아래 초가 정자가 살포시 자리를 잡았다. 인기척이 끊어진 공허한 산촌, 산새마저 낮잠에 들었는지 호젓하고 고요하다. 요란한 폭포소리가 정적을 깰 법도한데 웬일인지 더 깊어지는 듯하다.

호생관 최북(1712-1786)의 `공산무인도`가 담고 있는 풍정(風情)이다. 붓 가는대로 갈겨 쓴 화재도 그렇다. 빈산에 사람이 없는데 물 흐르고 꽃이 핀단다(空山無人 水流花開). 소동파의 시를 옮겨 적은 것이다.

글씨 못지않게 그림도 서툴러 보인다. 꾸밈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당대 최고 화가의 겸손 탓인지 어리숙하게 보일 정도다.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란 말이 이를 두고 한 것일 게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등성이와 모정, 수풀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전부다. 눈길을 잡는 것은 낙관의 위치다. 물론 낙관이 작품의 일부라고 하지만 그림 중간에 찍은 것은 개성일 수도 있으나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굳이 그림 한 가운데를 고집한 것은 천재의 자만이 아닐까. 화가의 삶이 그렇듯 경계를 거침없이 허문 탓일 것이다.

분방한 성격 탓인지 별호도 여럿이다. 칠칠이란 호는 북(北)자를 해체한 것이고, 은천자는 술을 주식으로 삼았던 중국 신선의 호를 빌린 것이다. 호생관은 붓(毫) 한자루에 의지해 먹고 산다는 의미다.

화가는 성격도 별나지만 자존심은 오뉴월 서리 빨이다. 돈 많은 양반이 그림을 청하다 거절당한 후 으름장을 놓자 스스로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 객기가 도를 넘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정신분열증 때문에 귀를 자른 고흐에 비유하기도 한다. 과히 억측은 아닌 듯싶다. 죽음도 수수께끼다. 언제 어디서 운명했는지 명확치가 않다.

유곽에서, 떠돌이 생활 중 남의 집에서, 여러 날 굶다 그림 한 점 판 돈으로 술을 사 마시고 집에 돌아오다 눈 구덩에 빠져서 죽었다는 등 굴곡진 인생만큼이나 저승길도 설이 여러 가지다. 굶기를 밥 먹듯 했지만 정신만은 꼿꼿했다. 열흘을 굶고도 그림 그려 동전 한 닢 생기면 술집을 찾아 폭음하고 취해 기행을 일삼고 풍류를 즐기던 시대의 음유시인이자 풍운아였다. 호생관의 꽂꽂한 정신과 자존심은 오늘을 사는 우리, 특히 정치인이 본받아야할 자세다. 공리는 없고 명리만 쫓는 삼류 정치인 말이다. 충남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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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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