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이 전격 성사되는 모양새다. 유엔에서는 부인했지만 중국 신화통신은 어제 "반 총장이 23일 평양을 방문하며 약 4일간 머무른다"고 날짜를 못 박아 보도했다. 지난 5월 예정됐던 개성공단 방문이 막판 수포로 돌아간 점을 상기할 때 극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다음 주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쏠리게 됐다. 덩달아 정치권이 바빠졌다.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다 보니 여야 모두 환영 입장을 내놓으면서도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구촌 평화와 안전, 인류 번영의 수호자인 유엔 사무총장이 세계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체제의 북한을 찾는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반 총장은 미얀마에서 리비아에 이르기까지 분쟁 지역을 방문해 조정 또는 중재 역할을 해왔다.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 방문 의지를 피력했고, "한반도 평화와 안보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해왔다. 남북관계 개선에 획기적 모멘텀으로 작용할지 주목되는 것 이상으로 20대 대권 가도에 미칠 여파가 핵심 관전 포인트다.

여의도의 주판알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권 플랜 가동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의구심 속에 셈법을 따지느라 복잡하다. 청와대와의 사전 교감설을 제기하는가 하면 방북을 계기로 `반기문 대망론`이 탄력을 받을까 경계하는 기색이다. 반 총장은 이미 `외교·안보` 역할론에 힘입어 대권주자 반열에 올라 있다. 충청권 출신으로 지역색이 엷어 더욱 매력이다. 장외에 머물고 있지만 최근 문화일보 여론조사에서 40-60대가 선호하는 차기 대선후보 중 압도적 1위에 올랐다.

방문 시기 역시 절묘하다. 친박(친박근혜) 핵심이자 새누리당 사무총장을 지낸 홍문종 의원이 개헌을 주장하며 반 총장을 띄운 게 불과 한 주 전 일이다. 이른바 `반기문 대통령-최경환 국무총리`의 이원집정부제다. 새누리당과 야권은 친박의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 행태라고 비판했지만 어느 새 반 총장의 발길은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더구나 박근혜정부가 반환점을 돈 가운데 반 총장은 임기를 1년여 남겨 놓은 시점이 아닌가.

현실정치와 철저하게 선을 그어왔음에도 반 총장의 최근 행보는 과거와 결이 다소 달라졌다. 얼마 전에는 한국지방신문협회 회원사인 강원일보와 단독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유엔과 강원일보의 생년월일이 같다는 이유로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대통령선거와 관련된 질문에는 "…"라고 답했다. 그동안 손사래를 쳐온 것에 비쳐볼 때 뜻밖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고향 언론 대신 대전일보 인터뷰를 통해 정계복귀를 시사한 걸 떠올리게 한다. `친반(친반기문)연대까지 창당 준비위 결성 신고를 마친 상황이고 보면 반 총장의 의중과는 관계없이 어느 새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선 양상이다.

이제 관심은 평양에서 가져올 보따리의 무게다. 신화통신 보도 중 김정은과의 회동 대목이 없어 북한의 반 총장 방문 수락 의도가 석연치 않다. 벌써부터 `김정은 체제가 폐쇄적이지 않고 안정적`이라는 선전용 카드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방북 세부 일정을 놓고도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인상이다. 반 총장의 정치력과 외교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남북관계 진전과 6자회담 재개 같은 한반도 정세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반 총장의 능력과 위상을 재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반 총장은 아시아적 가치와 리더십이 만들어낸 조용한 외교로 성공 신화를 써왔다. 물러나선 안 되는 상황이 오면 상상 이상의 결기와 단호한 결단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 자민당이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 반 총장에게 항의문을 보내자 "유엔은 중립적 기구가 될 수 없고, 공정한 기구"라고 일축한 게 대표적이다. 2006년 취임 이후 줄기차게 북한행을 추진해 방북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도 그의 끈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 총장의 성과는 곧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축복이다. 구체적으로 한반도 평화의 물꼬를 튼다면 `통일·외교`라는 시대정신 구현의 적임자로 탄탄히 자리매김 하는 건 덤이다.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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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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