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글거리는 태양을 불러와 진초록 싱그러운 여름을 주더니 살랑거리는 바람을 싣고 와 가을이라 이름 짓고 알록달록한 풍경에 맘 설레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느 때는 개나리를 피우고 줄장미를 피워놓더니 어느 때는 도라지꽃을 내보이고 또 나리꽃, 접시꽃을 펼쳐 우리 손을 끌어당겨 주저앉히고 코를 들이대 나를 잊게도 하고 새삼 새로워지게도 했지요. 언제는 개울가에 발 담그게 하더니 이제 당신이 일 년 동안 숨죽여 만든 물감을 풀어 우리를 놀래주고는 숨어 지켜보고 있지요? 때마다 감탄합니다. 당신의 솜씨를!

당신은 또 저를 두고 어떻게 하실까 궁리 중이시죠? 아장아장 걷게 하고, 종알종알 재잘대게 하고 뛰어놀게 하고 사랑을 알게 하고 아기를 낳게 하고 그리고 키우게 하시더니 어느 날은 시를 알게 하셨지요? 동화작가 보다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온 시간이 꽤 되네요. 연말이 코앞인데 시작 얘기를 할까 봐요. 봄은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이라지만 나는 지금이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이란 생각이 들어요.

작심삼일을 삼일마다 하다보면 일만 시간의 법칙쯤 이미 제 것이 되어 있을 테지요. 시인이 돼야지 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것도 동시인이라니요. 동심은 곧 천심이라지요. 감히 천심을 읽는 시인이 되다니요. 등단작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달리기 시합`이지요. 당선된 후 한동안은 달리기라는 말만 들어도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았고 심지어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할 때 `동시`라는 글자만 읽어도 나는 얼굴이 붉어지곤 했어요. 그 때 그 `처음 마음`을 언제나 기억하려고 합니다.

저는 달리기를 퍽이나 못합니다. 체력장 시험 때 100m를 23초에 뛰었다면 더 말해 무엇 할까요. 운동신경은 그야말로 젬병이지요. 그러나 시골에 산 탓에 말도 탈 줄 알았고(어디까지나 과거형이에요-어린 시절 이후로 말을 탈 수 있는지 제 실력을 검증해 볼 기회가 없었고 그 말도 승마용 말이 아니라 우리 집에 키우던 조랑말쯤이었을 테지요. 하지만 어린 제게 그 말은 적토마처럼 훌륭해 보였어요. 오빠는 그 녀석에게 제 엉덩이를 기억시킨다고 어지간히 애를 먹었어요.) 섬 아이들이 그러하듯 잠수도 잘했고 소라도 잘 잡았고 문어도 잘 잡았어요. 어른 해녀들처럼 숨비 소리를 낼 줄도 알았고요. 저는 바다 속을 그야말로 속속들이 알던 꼬마해녀였어요.

누가 "문어, 소라는 어떤 데 사니? 어떡해야 잡을 수 있니?"하고 물으면 나는 그들의 은신처를 설명하기가 어려웠어요. 그저 딱 보면 알겠기에 잡았을 뿐이지요. 딱 보면 안다는 이 말은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말인 동시에 한 분야에 종사한 세월의 무게를 품은 말이겠지요. 저는 섬에서 나고 자라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보다 바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그렇다고 바다를 다 안다는 말이 아니에요. 바다에서 보낸 시간이 많은 만큼 상대적으로 바다를 잘 안다는 말이지요.

제주 관광을 온 사람들이 잠수함을 타고 바다 속으로 잠깐 내려가 보는 삯으로 비싼 돈을 내는 게 내겐 돈 낭비로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지요. 내겐 잠수함이란 기계가 주는 신기함만 있지 바다 속을 본다는 신비감은 전혀 없거든요. 어릴 때 눈만 뜨면 들어가 보았던 곳이니 왜 안 그렇겠어요.

여러분은 무엇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나요? 여러분의 처음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띄웁니다. 가을은 그냥 이렇게 울렁이는 계절이니까요. 달력이 이제 두 장 남았네요. 마무리로 가는 길목에서 돌아보는 시간 어떠세요?

저는 오늘도 시를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시를 생각하고 쓰다보면 `딱 보면 쓰게 되는`그런 경지가 제게도 도래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모아 간절히 기다립니다. 딱 보면 시가 되는 그런 날. 딱 들으면 시가 되는 그런 날! 제게도 보내주시겠지요? 당신께서. 그런 날을 위해 겨울을 준비하는 당신의 손길은 여전히 분주하기만 하네요. 마음을 모아 경의를 보내는 오늘입니다.

김미희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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