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디플로머시 창간 40주년 임덕규 회장

외교가에서 임덕규<사진> 월간 디플로머시 회장은 `닥터 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임 회장이 직접 만나 인터뷰한 대통령과 수상, 국왕만도 500여 명에 달한다. 한국에 가면 디플로머시와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게 불문율처럼 굳어 있다. 임 회장은 영문 외교전문지인 디플로머시를 매개로 삼아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해왔다. 국위 선양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경제협력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디플로머시가 창간 40주년을 맞아 15일 오후 6시 서울 세종문회회관에서 각국 주한외교사절 등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리셉션을 갖는다. 임 회장은 "독립운동을 한다는 각오로 디플로머시를 창간했다"며 "대한민국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계평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25 전쟁 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나라가 67개국이다"라며 "이들 국가가 참여하는 `보은의 정상회의`를 열어 감사를 표시하고, 인류 평화에 앞장서는 운동을 전개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 영문으로 된 외교전문지를 창간한 배경은.

"저한텐 일가 아저씨인 데 독립운동가이자, 2대 외무장관과 주UN대사를 지낸 임병직 박사의 권유로 시작했다. 임 박사께선 `밥만 먹고 살 생각하지 말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 영문 잡지를 만들어 외국 지도자를 설득하면 국익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백색전화(통신시설이 부족한 시절 양도 가능한 전화)`와 집을 저당 잡히고 3년 준비 끝에 1975년부터 발간에 나섰다."

-편집 방향이 무엇이었는 지 궁금하다.

"표지에는 대통령과 수상, 국왕이 아니면 싣지 않았다. 편집 철학은 `장점 따라 삼만리`였다. 세계 평화를 위해 모든 나라의 좋은 점만 보기로 했다. 특히 한반도 평화 정착과 평화통일을 지향했다. 당시 이범석 장군과 이갑성옹, 윤치영 박사, 임영신 총장, 안호상 박사 등 독립운동가를 자주 뵈었는 데 이 분들이 한결같이 지향한 `반토막이 아닌 통일된 조국`을 위한 잡지를 만들고자 했다."

-40년 동안 수많은 정상들과 인터뷰를 해왔는 데.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등 대략 500여 명이 넘는 것 같다. 알제리 대통령을 국빈방문 형식으로 한국을 다녀가게 한 뒤 한국에서 알제리의 모든 공사를 수주하도록 측면 지원했다. 그래서 였는지 박동진 전 외무장관은 `임덕규 회장이 한국과 가장 먼, 김일성과 가장 가까운 알제리 부테풀리카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 만든 것은 외교의 기적이다"라는 글을 썼다. 헝가리 그로스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한·헝가리 우호증진에 기여한 대목도 머리 속에 남아 있다. 93년에는 라오 인도 수상 환영 조찬을 주관해 현대자동차 등 우리 기업의 인도 진출을 도왔다."

-에피소드가 적지 않을 것 같다.

"1977년 터키 방문 시 총선에서 야당 승리를 예상해 에치비트라는 야당 당수를 만나 사전에 인터뷰했는 데 실제로 승리했다. 디플로머시에 에치비트 수상 특집을 세계 최초로 심층 보도해 양국간 우호 증진에 기여하는 결실을 거뒀다. 2005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초청 방문 시 왕세자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특집보도로 수년 간 제 2의 중동건설 붐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이후 외교가에서는 "임 회장이 해외에 가면 안된다. 정권이 바뀐다"는 농담이 회자됐다고 한다.

-주한미군 철수 논의가 한창일 때 싱글러브 장군을 설득한 일화를 들려달라.

"30여 년이 흘렀으니 공개해도 될 것 같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계획이 나온 뒤 미 8군 사령부 싱글러브 장군에게 `미국의 이익을 위해 철군하면 안된다. 미국의 국력이 약화된다`고 거듭 설득했다. 우리 입장보다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췄다. 싱글러브 장군은 기자회견을 통해 `철군해선 안된다`는 소신을 밝혀 해임됐지만 미국은 결국 정책을 포기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을 위해서도 큰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보람에 남는 일이 있다면.

"반기문 UN사무총장을 만드는 데 앞장 선 일이다. 세계적인 인맥을 총동원해 `반사모(반기문을 사랑하는 모임)`를 만들어 반 총장 탄생을 위해 뛰었다. 장쩌민 중국 주석에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한 일도 기억에 또렷하다. 11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는 1982년부터 남북총리회담이 이루어지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힘써 큰 성과로 이어졌다."

-앞으로 계획을 설명해달라.

"6·25 때 우리를 도와준 국가가 67개국이나 된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다들 외교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데 `보은의 정상회의`를 열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캠페인을 하고 싶다. 통일이 된 뒤에는 이들 국가의 희망하는 국민들이 DMZ(비무장지대)에 와서 살 수 있도록 `평화의 마을`을 만들면 어떨까. 우리도 이제 세계를 위한 공헌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여러 곳에서 요청이 있는 데 `디플로머시 어워드(상)`를 제정하는 문제도 구상 중이다." 서울=송신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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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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