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이슈 가득한 사회 흘러가는 유구한 세월 속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

댐이 생기며 잠겨버린 마을이 부포다. 아버지 고향이다. 바다에서 먼 내륙 물 밑에 난데없는 뜬 부두 마을이라니…. 그런데 옛날엔 모두 그랬다. 강을 오르내리는 게, 길도 없는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큰강 굽이굽이 쉴 만한 곳엔 여지없이 큰 부두와 포구가 있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배가 끊기고 자동차와 기차만 타본 우리세대는 불과 100년 만에 세상이 이렇게 변한지 잘 모른다. 빨리 바뀌는 세상보다 망각은 더 빠른 속도를 가졌다.

이번 추석은 스페셜이었다. 오랜 가뭄으로 물에 잠긴 뜬 부두마을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청고개 넘어 옛날엔 없던 새로 난 아스팔트길을 휙휙 운전해 마을 어귀, 역동서원에 차를 댔다. 성묘 갔던 아버지와 두 아들이 나란히 서 옛 마을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옛 이야기에 신이 나신 아버지에 세월이 참 무색하다. 물에 잠긴 세월과 함께 강줄기, 산세도 바뀌고, 나무도, 들판도, 사람도 바뀌었다. 그동안 누군가는 새로 나고, 아둥바둥 살았다. 또 누군가는 옛 마을 근처 산 어귀에 묻혔다. 부포마을을 사라지게 한 안동댐이 1975년에 준공됐다니 어느덧 40여년이다. 12살에 마을을 떠나, 삶의 여러 풍상을 넘어 고희를 훨씬 넘긴 아버지는 어떤 감회일지 궁금하다. 누구나 자기 삶, 역사가 있다.

공천갈등으로 여야가 시끄럽다. 선거구 획정은 아직 안 됐고, 교육부 과장은 어떤 대학 뒷배를 봐 주다 덜컥 걸렸단다. `블랙 프라이 데이`라며 온 나라가 소비를 늘려보려 몸살이다. 국가경쟁력이 떨어져 걱정이고, 인구가 늘지 않아 또 걱정이다. 직장인 배재대는 수시모집이 끝나고, 서류와 면접심사를 준비 중이다. 다음 주부턴 학교에 세계한국어전문가가 와 2주간 연수를 받는다는 현수막도 걸렸다. 좀 지나면 중간시험 보는 학생들로 도서관이 북적북적 할 거다. 간만에 주말을 맞아 가족을 데리고 부여에 다녀왔다. 백제문화제라며 사람이 한 가득이다. 부소산성 산책길. 오랜만에 청명한 가을하늘과 서늘한 바람, 단풍으로 접어드는 나무가 참 좋았다. 아이들은 임시로 설치해 놓은 놀이기구도 타고, 장난감 자동차도 탔다.

또 40년이 지난 후, 이런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 아니 기억이라도 할 수 있을까. 9살 꼬맹이 큰 아이가 장년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유장히 흐르는 강물처럼 가고가고 가기만 하는 세월에 얹어보면 오늘의 분주함과 소동이 참 사소하게 느껴진다. 온 나라가 별일이라며 긴급이라며 큰일이라며 하던 일들도 한 달만 지나면 아무도 기억치 못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늘 괜히 바쁜 학교도 나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따라 한 개인에게 살아간다는 게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가 참 궁금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사람이 사는 게 연극 같다 했다. 내 생각대로, 열심히 정신 없이 산다고 하지만, 한걸음 떨어져 내 모습을 바라보면, 정작 이런저런 노릇하느라 바쁘다는 거다. 집에선 가족과 연극을 하고, 직장에선 학생, 동료와 연극을 한다. 사회에선 만나는 사람과 대사를 치고 상황에 맞는 지문을 짜내 제스처를 한다. 가끔 혼자 있는 나 자신도 결국은 모노드라마 속의 한 인물일 뿐이다. 누구에게든 인생은 극본이 없는 연극이다. 그렇다면 연기하는 나 말고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어쩌다 1년, 또 어쩌다 5년, 그리고 또 10년을 이렇게 살다 보면 어느덧 지금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런저런 노릇하느라 자기 삶, 한 세월 속에 쌓인 것은 무엇이고, 덮은 것은 무엇이며, 가슴에 묻은 것은 얼마나 될까. 참 열심히 살아 오셨다 생각하지만, 삶이란 내 맘 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다반사다. 내 문제도 자식문제도 재물도. 그래서 늙어져 청장년을 돌이켜 보면, 아쉬움과 회한이 더 클 것은 당연지사. 운이 칠이고 기가 삼이라도 되는 인생이라면 정말 복 받은 인생이 아닐까. 극본 없는 연극을 하다 즐거워하거나 상심할 때마나 열심히 몰입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가을, 칠십 평생 살아보니 살아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는 은사님의 몇 년 전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이혁우 배재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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