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넓은 들판·유유자적 물줄기 숨겨진 캠핑 명소 '부소담악'

‘장계산 관광지’는 정지용 시인의 흔적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반갑다. 식당 벽면 뿐 아니라 다양한 시설물 담벼락에 정 시인의 글귀가 적혀있다.
‘장계산 관광지’는 정지용 시인의 흔적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반갑다. 식당 벽면 뿐 아니라 다양한 시설물 담벼락에 정 시인의 글귀가 적혀있다.
하늘색이 진해졌다. 거리 곳곳에 나 있는 풀의 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이지 않는 바람도 파래진 느낌이다. 아직 태양은 뜨겁지만 손 끝에 전해지는 시원한 공기가 즐겁다. 일교차는 커도 가을이라는 생각에 괜시리 풍요로운 느낌이다. 도심을 벗어나면 이 감정이 분명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시적 감수성을 다스려야만 했다. 그래서 떠났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가 지줄대는 바로 그곳으로. 시와 낭만이 살아있는 가을날의 충북 옥천으로.

◇유유자적, 부소담악=떠나간 그곳은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다. 갈색 옷으로 갈아입은 들판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은 가을 하늘 아래 오색으로 수놓여 있다. 군북면 추소리의 `부소담악`은 감입곡류천의 부드러운 곡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부소담악은 과거 대청호가 생기기 전 감입곡류천인 `소옥천`의 한 구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청호가 들어선 후 지형이 점점 특이하게 바뀌며 부소담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부소담악은 사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곳이다. 덕분에 이맘때 쯤 몰려드는 캠핑족들의 `점령`을 당하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다. 이날 찾았을 때도 캠핑을 즐기러 온 가족단위 관광객들을 단 2팀 발견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은 너른 들판을 거닐거나 사진을 찍으며 자연이 만들어 낸 독특한 향취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추소리 마을 입구로 들어갔기에 자동차를 둘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강변 근처까지 가서 간신히 차를 댄 후 천천히 걸어나갔다. 강은 마을 바로 아래 펼쳐져 있다. 선선한 날씨 덕분인지 강 주변에 있는 풀들도 억센 성격을 누그러뜨린 느낌이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편안한 장소인 것 같다.

이윽고 들어선 강변. 드넓은 물줄기는 급할 것 없이 유유자적 흐르고 있다. 풍파를 겪어낸 깎아지른 듯한 돌벽은 특이한 모양새다.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만들어낸 예술작품 같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산 중턱에 자리잡은 조그만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모양과 위치는 아주 많이 다르지만, 과거 충북 영동에서 봤던 `월류봉`의 정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천 외곽에는 조그만 나룻배가 떠있었다. 모터 같은 동력원이 없다. 노를 저어 움직여야 하는 모양이다. 풍류가 살아있는 옥천인 만큼 올라타 탁주를 마셔보고 싶다. 하지만 주인장 없이 덩그러니 배만 남겨져 있을 뿐이다.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들어 들판을 걷기로 결정했다. 가을색으로 천천히 바뀌는 버들강아지 같은 들풀의 냄새가 좋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들판 쪽으로 걸어가며 물, 그리고 풀냄새를 느껴봤다.

들판에 들어서자 `가을의 전령` 잠자리들이 부지런히 날아다닌다. 아주 오랜만에 고추잠자리도 볼 수 있었다. 천천히 풀섶을 걸어가는데 `푸드득` 거리며 커다란 새 한마리가 달아난다.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다. 자리에 앉았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봤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살랑거리는 바람에 풀 부대끼는 소리가 난다. 간만에 느껴보는 여유에 잠시 몸을 맡겼다.

◇장계산 관광지, 정지용 시인의 정취=`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란 하늘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정지용의 시 향수中)`

가을 무렵 사진이나 영상으로 금빛 들녘의 모습을 접할 때마다 항상 이 시, 그리고 노래가 떠오른다. 이제는 명곡의 아름다운 가사 정도로 기억되지만 `향수`는 정지용 시인의 고향인 옥천을 다룬 작품이다. 사실 라디오에서 이동원·박인수의 노래를 들을 때면 문득 정 시인의 고향이 어떤 모습일지 참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천까지 찾아온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음으로 찾은 곳이 대청호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계산 관광지`였다. 정 시인뿐 아니라 다양한 시인들의 작품이 많이 다뤄진 곳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정 시인의 글귀가 곳곳에 적혀있다. 아니, 그려져 있다. 식당 벽면에 앙증맞게 그려진 시화가 눈을 사로잡는다. 관광지 입구에 있는 다양한 식당 건물조차도 그를 기리고 있다. 마을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관광지가 나온다. 주차장에 들어서면 대청호를 배경삼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조형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강변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정 시인의 `병`이라는 시를 병모양 조형물에 새겨놓은 재미있는 작품도 구경할 수 있다. 구내 식당 벽면에, 그리고 조형물 담벼락에서 조차도 그의 흔적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반갑기만 하다.

장계산은 관광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내부에 전통사 박물관도 세워져 있다. 조상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담아놓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박물관을 끼고 강변으로 가도, 산길로 가도 볼거리는 충분하다. 시 관련 조형물 뿐 아니라 대청호가 가진 특유의 멋이 곳곳에 스며있어서다. 때문에 넋을 놓고 하염없이 걸어도 좋다. 정 시인과 자연이 친절하게 안내하는 대로 발걸음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비록 실개천은 커다란 대청호로 바뀌었지만, 옛 이야기는 아직도 어렴풋이 들리는 것만 같다.

◇둔주봉에서 바라본 한반도=자연을 벗삼아 걷다 보니 문득 `옥천의 산세가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퉁불퉁 이어지는 산은 특유의 비대칭적인 모습으로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소 늦은 시간이었기에 부랴부랴 가볍게 오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래서 찾게 된 곳이 안남면 연주리의 `둔주봉`이었다. 주변 산세를 조감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한반도 모양을 닮은 산을 멀리서 바라볼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둔주봉은 연주리를 거쳐야 들어갈 수 있다. 안남초등학교를 끼고 돌아 연주리 마을로 들어서면 둔주봉 입구까지 갈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당연히 걸어 올라가야 한다. 한반도 지형의 산을 감상할 수 있는 `한반도 전망대`까지는 약 800m. `이정도 쯤이야`라는 생각에 자신있게 올라섰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산기슭이 가팔라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초가을, 산, 그리고 늦은 오후라는 시원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지만 땀이 비오듯 흘렀다. 황톳길 옆에 산 다람쥐가 지나가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왜 올라가려고 생각했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올라가기를 약 20여 분. 멀리서 조그만 정자 모양을 한 건물이 보였다. 한반도 전망대였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간신히 다다랐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바라본 모습은 절경 그 자체였다. 힘들었던 것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푸른 산 주변을 맴도는 강물은 아무 말 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고요하다 못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포근한 풍광이 주는 의외의 따스함에 온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정자에 잠시 걸터앉았다. 그리고 `향수` 노래를 생각했다. 실개천은 여전히 이곳을 휘돌아 나가고 있다. 비록 서리 까마귀가 우지짖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풀섶의 이슬은 영롱함을 머금고 있었다. 차마 꿈엔들 잊힐 수 있을까. 선생의 유년시절로부터 100여 년이 흘러도 이곳은 지금도 아련한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위에 더욱 긴 세월이 쌓여도 아마 이곳의 지줄댐은 여전할테다. 글·사진=전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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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의 ‘부소담악’은 감입곡류천의 부드러운 곡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의 ‘부소담악’은 감입곡류천의 부드러운 곡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안남면 연주리의 ‘둔주봉’은 주변 산세를 조감할 수도 있고 한반도 모양을 닮은 산을 멀리서 바라볼 수도 있다.
안남면 연주리의 ‘둔주봉’은 주변 산세를 조감할 수도 있고 한반도 모양을 닮은 산을 멀리서 바라볼 수도 있다.

전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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