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관객 동원! 요즘 한국영화의 목표다. 한국에서 배급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목표 역시 마찬가지이다. 천만을 넘긴 영화든 천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영화든, 액션물 혹은 액션에 SF를 곁들인 소재가 한국인 관객들이 열광하는 대상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액션 혹은 SF 액션에 담아내는 주제 의식은 한국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 한국 영화로 관객 천만 이상을 끌어 모은 영화들의 특징은 그 속에 역사의식 혹은 세태의식을 반영한다는데 특징이 있는 것 같다. 반면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는 그것의 소재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 결론에 `가족`이 강조된다는 특징이 있다.

영화 문외한이 어설픈 평을 곁들이자면, 적당한 역사의식 혹은 적당한 세태의식에 적당한 액션 혹은 극적 요소를 잘 버무려내면 흥행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반면 할리우드 영화, 그것이 액션이든 SF이든 아니면 드라마이든 간에, 할리우드 영화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족`이 강조된다. 그렇다고 할리우드 흥행작은 가족애를 강조하는 훌륭한 영화이고, 한국의 흥행작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을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할리우드 영화가 강조할 수밖에 없는 배경에, 가족을 양념처럼 버무려야만 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현실이 있고, 거기에는 가족, 가정이 붕괴된 미국의 현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가족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를 흥행작으로 만들어내는 한국사회는 여전히 가족, 가정이 붕괴되지 않고 버텨내고 있는 것일까? 필자의 관점에서 말하면, 한국사회 역시 미국사회 못지않게 가족, 가정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된다. 아니,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가족 혹은 가정은 더 빨리 붕괴되었고, 이제는 어디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장은 여전히 산업발전, 선진국 진입의 역군으로 산업현장을 지켜야만 한다. 그럼 아이들은? 그 가장의 담장을 둘러치고서 차세대 사회일꾼으로 성장하기 위한 쳇바퀴 교육을 감당하느라, `집`같은 것은 고민할 여지도 없다. 가정주부,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단어이다. 가정을 지탱하기 위해 맞벌이 일선에 투입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사회에서 가정은 그리고 가족은 언제 존재하는가. 주말?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잔업에 바쁜 아빠가? 초등학교부터 학원 쳇바퀴 따라가기 바쁜 아이가? 맞벌이에 가정살림에 내몰려 한숨을 내쉬고픈 엄마가?

선진국 진입 혹은 이미 선진국임을 독려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있다. 세계일류 기업을 강조하는 대기업이 있다. 그러면서 창조적 경제 성장, 국민 기초 복지의 향상을 외치는 정치인들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한 가정 한 가정의 울타리가 붕괴되어 파산직전이라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는다. 일등국가, 일류기업, 그리고 성장의 뒤편에서 개인도 가족도 그냥 성장의 부품이 되어버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진 성장 시대의 산업부품, 그것이 한국사회의 가정이고 개인이며, 또한 노동자라고 불리는 이들이기도 하다. 지식노동자, 육체노동자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장에 적합하지 않은 부품은 언제든 성장에 도움이 되는 부품으로 바꿔치기 당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적합한 부품, 지쳐서 녹슬지 않는 부품이 되어야만 하는 야만의 사회가 한국사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제 제발 미국 따라 하기만 하지 말고, 왜 할리우드 영화들이 캠페인처럼 `가족`을 강조하는지 되새겨보자. 제발 산업현장에 부품이 되어버린 노동자들을 가끔은 `가족`에게 되돌려주자. 설사 그것이 녹슬기 전의 기름칠에 불과할지라도 흉내라도 내는 사회가 우리 사회였으면 좋겠다. 가끔 부품에 불과해 보이는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노동자로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주어지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석길암 금강대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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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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