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동백정이 있는 언덕은 노을을 감상하기 제격이다. 타는 노을은 바다와 산을 포근히 끌어 안는다.
동백정이 있는 언덕은 노을을 감상하기 제격이다. 타는 노을은 바다와 산을 포근히 끌어 안는다.
바람이 달라졌다. 녹빛 숨결을 불어넣던 여름 바람은 어느새 시원한 갈바람으로 바뀌었다. 갈바람엔 가을 향기가 가득 배어있다. 상큼하기보단 구수하다. 가을은 뜨겁던 볕도 식혔다. 작렬하는 태양이 누그러지자 하늘이 높아졌다. 그 모습이 너무도 맑아 산너머 남촌까지 보일 것만 같다. 봄은 아니지만 시원한 갈바람을 맞으며 조붓한 오솔길을 걷고 싶었던 이유다. 그래서 계절을 따라갔다. 떠나간 곳의 들녘은 갈빛으로 옷을 바꿔 입는 중이었다. 여름은 떠나기 아쉬운 듯 반팔 끝자락을 붙잡고 있지만, 차츰 다가오는 가을에 이미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늦은 여름, 혹은 가을 초입의 충남 서천은 가을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갈대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벼 이삭이 익어 고개를 숙일 무렵 늦은 꽃이 핀다. 쉽게 흔들리기도, 혹은 굳세기도 하다는 갈대의 얘기다. 한산면의 `신성리 갈대밭`은 우리나라 4대 갈대밭으로 꼽힐 정도의 관광 명소다. 19만 8000㎡에 이르는 지역에 갈대가 군락을 형성해 장관을 이룬다. 갈꽃이 만개한 후 일대를 걷다 보면 꽃 익어가는 냄새에 절로 취할 정도다.

평일 오후 찾았기 때문인지 인적이 뜸하다. 북적이던 지난해 가을 찾았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이다. 사람은 적지만 행복감만은 그대로다. 갈대밭 주차장에 도착한 어느 가족이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자 괜시리 마음이 따뜻하다.

신성리 갈대밭은 지난 2000년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주차장에 들어서면 멀리 언덕 위에 서있는 사람이 보인다. 움직이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 쯤 다시 보면, 배우들을 재현한 입간판이라는 사실을 알고 피식 웃게 된다.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갈대밭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 관광 명소였지만,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이후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며 새삼 주목받게 됐다. 영화 흥행 전에는 갈대가 빽빽하게 들어차 일반인이 안으로 쉬이 들어설 수 없었다. 다행히 영화의 성공 이후 관광객들을 위한 길이 생겨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흠뻑 느낄 수 있다.

주차장과 갈대밭 사이에 있는 야트막한 둑을 넘었다. 둑에 올라서면 너른 갈대밭과 금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멀리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걸어가는 노인장이 보인다. 걸음이 정겹다. 높은 하늘과 어울려 그림같은 모습이다. 그를 뒤로 한 채 사진기와 물통을 들고 천천히 갈대밭으로 내려갔다.

갈대밭엔 아직 녹빛이 짙게 깔려있다. 여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땅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계절의 흐름은 어쩔 수 없나보다. 갈대는 밑둥부터 천천히 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살짝 마른 갈대는 가을의 소리가 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 몸을 부대끼며 `사각 사각` 소리를 낸다. 내부에 마련된 벤치에 잠시 앉아 그 `음악`을 감상했다. 갈대밭이 원체 넓다보니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기 쉽다. 입간판만 보고 따라가다 2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만든 길. 더듬어본다는 마음으로 걷다 보면 금세 금강과 마주하게 된다. 넓은 강의 매력을 한껏 느끼려 강변을 따라 걷고싶지만 갈대가 빼곡이 둘러 차 다소 어렵다. 그래도 강변에 조성된 전망대 덕에 사진을 찍을 수 있어 마음이 놓인다.

아무리 걸어도 갈대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다 보니 지겨울 법도 하겠다. 오산이다. 넓은 갈대밭은 팔색조의 매력을 자랑한다. 영화테마길, 철새소리길 등 다양한 테마로 길이 만들어져 있어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천천히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직은 먼 동백의 아름다움이 흐드러지다=꽃이 피려면 아직 멀었다. 망우리를 틔우려면 앞으로 넉 달은 족히 남았다. 붉은 꽃망울이 터지지 않아도 녹빛이 가득해 아름다움을 가릴 수 없다. 서면 `마량리 동백나무 숲`. 그 아름다움으로 지난 1965년 4월 천연기념물 169호로 지정됐다. 500년 수령의 동백나무가 80그루나 자라고 있다. 아직 꽃 향이 나진 않지만, 세월 덕분인지 숲에서 오래된 냄새가 난다. 동백나무숲은 서해바다 접경에 위치하고 있다. 바다와 숲이 만나 절묘한 아름다움을 만든다. 꽃이 없어도 찾고 싶었던 이유다.

갈대밭에서 약 1시간 동안 차를 몰았다. 입간판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길치`인 탓에 길을 찾기 어려웠다. 홍원항과 가까워 그쪽 방면인줄로만 알았다. 잠시 들른 홍원항은 아직은 잠잠했지만, 오는 12일부터 25일까지 2주간 열릴 `제15회 서천 홍원항 자연산 전어·꽃게 축제`를 준비하느라 들뜬 분위기였다. 이제는 흔한 표현이지만, `집나간 며느리도 전어 굽는 냄새를 맡으면 집에 돌아온다`는 전어와 살이 꽉찬 꽃게를 생각하니 입에 군침이 돌았다.

동백숲은 홍원항과는 반대방향. 간신히 길을 물어가며 숲을 찾았다. 헌데 다소 어색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숲 바로 앞에 있는 서천화력발전소 탓이다. 높은 공장 굴뚝, 첨단 설비가 숲 바로 옆에 있어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다소 뜬금없는 배치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게 또 나름의 매력이 있다. 숲 언덕에 올라 발전소를 바라보는 맛도 생각보다 쏠쏠하다. 생태와 인간의 조화라고 생각하면 나름의 멋이 있다.

얕은 산 위에는 커다란 정자인 `동백정`이 자리하고 있다. 길은 2개다. 하나는 올라갈 때, 하나는 하산할 때 사용한다. 하산할 때 사용하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다. 올라가는 코스의 계단 양쪽에는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져 있다. 천천히 감상하면서 올라가면 동백정에 오를 수 있다.

동백정 옆엔 `마량당집`이 있다. 500년 전, 바다에 나간 남자들이 풍랑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일이 종종 있었다. 마량당집은 자식을 잃은 한 노파가 용왕의 화를 달래기 위해 지은 일종의 사당이다. 동백나무도 이 당시에 함께 심었다. 동백나무 숲의 유래다. 동백정은 2층 구조다. 2층에 오르면 망망대해를 감상할 수 있다. 굳이 2층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동백정 정면이 트여있어 바다가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멀리 `오력도`가 보인다. 일몰 시간, 지는 해와 섬이 어우러지면 기가막힌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날도 늦은 시간 방문한 덕분에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타는 노을이 오력도를 포근히 끌어 안는다. 푸른색의 저녁바람과 대비되는 느낌이다.

여름이 지나간 자리엔 갈빛, 아니 가을빛이 들어왔다. 계절이 떠난 자리엔 또 다른 계절이 따라 들어온다. 지친 일상, 바뀐 계절처럼 새로운 마음을 들여 보는 건 어떨까. 그렇다면 계절이 불어온 그곳으로, 가을이 타고 들어온 그곳으로 떠날 때다. 전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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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면의 ‘신성리 갈대밭’은 우리나라 4대 갈대밭으로 꼽힐 정도의 관광 명소다. 19만 8000㎡에 이르는 지역에 갈대가 군락을 형성해 장관을 이룬다.
한산면의 ‘신성리 갈대밭’은 우리나라 4대 갈대밭으로 꼽힐 정도의 관광 명소다. 19만 8000㎡에 이르는 지역에 갈대가 군락을 형성해 장관을 이룬다.
마량리 동백나무숲이 위치한 얕은 산 위에는 커다란 정자인 ‘동백정’이 자리하고 있다. 길은 2개다. 하나는 올라갈 때, 하나는 하산할 때 사용한다. 전희진 기자
마량리 동백나무숲이 위치한 얕은 산 위에는 커다란 정자인 ‘동백정’이 자리하고 있다. 길은 2개다. 하나는 올라갈 때, 하나는 하산할 때 사용한다. 전희진 기자

전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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