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 회담은 잔인했다. 음모와 흉계가 난무했다. 회담 결과 옛 소련은 참전했고, 5일 만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승전국 지위에 올랐다. 이는 곧 북한에 진주할 근거가 됐다.

회담의 주역인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병약했다. 네 번째 취임식을 마친 뒤 얄타로 향한 그는 장기간 비행으로 녹초가 됐다. 고혈압과 심장확대증을 앓던 처지였다. 우람한 체구의 스탈린은 그런 루스벨트를 압박하며 몰아붙였다. 마침내 말끔한 정장 차림의 루스벨트가 대원수 군복의 스탈린에게 무릎 꿇었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2015년 8월 판문점은 정반대였다. 황병서에게 군복은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김정은의 지시를 받는 북 총정치국장의 모습은 초라했다.

우리 측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눈매는 매서웠다. "`기세 밀릴 땐 허리를 꼿꼿히 세우라`는 행동지침이 내려갔다"는 말이 들렸다. 무박3일 40시간의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사과`라는 말을 한번도 꺼낸 적 없는 북한이었다. 결국 "유감 표명"을 약속하고 무대 뒤편으로 쫓겨갔다.

TV 속 북한 여성 아나운서는 `북한은(…)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고 읽어 내렸다.

우렁찬 목소리에도 표정은 초췌했다. `북측은 준전시상태를 해제하기로 하였다`고 했을 때 인민들 심사는 어땠을까. 북이 사과의 주체를 명시한 건 처음이다.

두루뭉술 `유감`으로 표현했지만 영어로 `Regret`나 `apologize`는 외교적 수사로 변용되면 사죄, 반성, 책임에 다름 아니다. 회담에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 한 외교전문가의 말이다.

회담 전부터 승부의 추는 기울어져 있었다. 북은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썼다. 회담 시간도 우리 측 의도대로다. 북의 추가 도발 공언 시점인 오후 5시를 넘겨 대화 테이블에 앉았다. 이미 무력 응징을 한 터였다. 2013년 북한의 개성공단 폐쇄 사태 당시 원칙론을 고수해 북측이 책임 일부를 인정한 전례도 있었다.

특히 `도발-협상-보상-재도발`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가 단호했다. 남남갈등 노림수마저 통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아바타(분신)가 김정은의 그것을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승자는 박 대통령이다. 최대 수혜자가 됐다. 소신과 원칙, 결기의 결과다. 국회의원 시절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내공을 기른 게 바탕이 됐을 것이다.

남북이 대치하자 우리 병사들이 전역을 연기하는 보너스까지 얻었다. 임기 반환점을 돌던 날 새벽 낭보는 천군만마가 됐다. 곧바로 SK하이닉스 M14 반도체공장 준공 및 미래비전 선포식 참석을 위해 한걸음에 지방으로 갔다.

26일에는 새누리당 국회의원 150여 명과 오찬을 하고 노동개혁 등 국정과제 추진의 협력을 당부했다. 복마전 같은 동북아 외교무대의 주도권을 잡은 것도 성과다.

승리에 길게 도취돼선 안 된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 갈 길이 험하다. 황병서는 공동보도문 잉크가 마르기도 전 `근거없는 사건` 운운했다.

`군사적 충돌`이라는 표현도 동원했다. 유감을 표명한 TV에 나타나 후안무치한 궤변을 일삼았다. 박 대통령의 초강수에 기겁을 하더니 언제 그랬느냐고 오리발이다. 마지못해 겉으론 대화하면서 속으론 도발을 꾸밀 게 분명하다. 북의 고질병인 못된 버릇을 고치는 건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렸다.

`통일 대박`으로 가기 위해선 낙관론은 금물이다. 원칙론으로 압박 수위를 높이며 북의 벼랑 끝 전술을 역이용하는 전략이 요구된다. 공동보도문 합의 사항대로 이산가족 상봉과 민간교류에 속도를 내되 실질적인 대북 억지력을 길러야 한다. 당근과 채찍으로 북을 길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남북당국 회담부터 첫발을 잘 뗀다면 정상회담의 문을 열 수 있다. 북 도발 진행 과정에서 보여준 성숙한 국민 의식은 기본 중 기본이다.

서울지사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송신용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