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심정으로 백범 김구선생의 손자들을 본다. 오래 전에는 그의 맏손자가 뇌물수수로 국영기업체의 사장직에서 불명예퇴직을 하더니 이제는 그 둘째 손자가 또 방위산업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온 평생을 독립을 위해 몸 바쳤던 나라의 대 은인이요 스승으로도 존경받는 백범의 손자이기에 남다른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마치 백범의 유족이라는 것이 무슨 큰 권력이나 되는 듯이 거드름을 피면서 뇌물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니 하는 말이다.

특히 김양 전 보훈처장의 경우는 통상의 뇌물죄와는 사뭇 다른 내용의 것이다. 자신의 집 주소에 항공우주산업 컨설팅업체를 설립해 이 법인 명의로 해외 방위산업 업체와 고문계약을 체결하고 자문료와 강연료로 14억 원을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해상작전헬기 도입이 자신의 로비로 성공하면 또다시 수십억 원을 받기로 해외방산업체와 계약을 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백범은 자신의 일지에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렇다. "안준생은 왜놈을 따라 본국에 돌아와 왜적 이등박방(伊藤博邦)에게 부친 의사(義士)의 죄를 사하고 남 총독을 애비라 칭하였다 (남 총독은 1936~1942년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郞)이다(도진순)). 여기서 말하는 준생은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이다. 신부가 되기를 바랐던 첫째 아들은 8살에 죽고 병약한 아들 준생만이 근근히 살아 백범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저질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왜정 치하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들로 살아남기가 그리 쉬운 일이었겠는가! 죽을 일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중국 상해로 쫓겨 다니는 감시속의 가시밭길만이 그들의 삶의 현장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떤 연유가 되었건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 중 손녀들은 미국으로 떠났고 손자 웅호와 아들 준생 내외는 49년에야 상해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바로 6.25를 만났다. 부산 피란중에 준생씨는 죽고 그 아들 즉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혈손 안웅호씨는 195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유명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 어머니 정옥녀는 92년 한국에서 작고했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은 백범 김구선생의 유족과는 달리 정부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은 것도 없이 스스로를 드러내지도 않은 채 묵묵히 살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안 의사의 아들 준생의 변절 때문일까? 변절을 했다면 안중근 의사의 아들 준생이 한 것이지 손자가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살고 있는 유일한 손자 안웅호씨에게 기자(김병무)가 물었다. 안 의사의 손자이면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라고 말이다. 벌써 5~6년전 일이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내 재능을 필요한 데 쓸 수 있게 된 것 자체로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내가 나를 드러내는 일은 조부님의 위대성을 손상시키게 되는 것이고 그 영예를 내가 차지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그 즉시 "딴 생각 말고 그냥 죽으라고 그래라!"라는 말을 전했다. 이를 두고 어느 언론에서는 "是母是子" 즉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썼다. 장한 일을 한 아들이 행여나 항소라도 해서 스스로의 명예를 훼손시킬까 두려운 마음에서 나온 어머니의 눈물겨운 한마디였다. 안웅호의 회견문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라고!"

유족이라는 존재가 무슨 권력이나 권세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즈음의 세태를 보면 `유족`이라는 것이 마치 무슨 큰 권력이거나 권세나 되는 것처럼 위세를 떨고 있으니 하는 얘기다.

전환경부장관 UN환경계획 한국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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