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 동화작가
김미희 동화작가
잔다. 먹는다. 꼬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존재 이유가 이 세 가지로 요약되어지는 시기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그 시기를 본의 아니게 거쳐야 한다. 늦은 밤. 학교 숙제, 학원 숙제로 시간이 흐를수록 굳어져가는 얼굴이 그려지고 토독, 토독 샤프심 목숨이 부러지는 소리가 딸애 방에서 들린다. 화풀이 대상으로 발탁된 샤프 목숨을 살리고픈 마음에 내가 다가가 물었다.

"춘기 씨가 오셨어? 이 한밤중에? 졸린 눈을 비비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반겨줄 이도 없는 걸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굳이 올 필요는 없는데! 그 분 참 눈치 없네!" 그러자 딸애가 그런다. "엄마가 일부러 부른 건 아니고?" 연필심한테 하던 화풀이를 멈추고 배실 웃어주고 대답까지 한다. 반응을 보이다니, 은혜로움에 엄마는 반갑다 못해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말하기 시작한 날처럼 감격스럽다. 이에 딸한테 왔던 춘기 씨는 도로 자러 돌아간 듯 연필심도 평온했다.

오늘은 어찌 넘겼지만 사춘기, 줄여 춘기 씨는 언제 또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불청객, 춘기 씨를 두려워하며 부모들은 살얼음판을 딛는 기분으로 보낸다.

`지랄총량`을 채워야 질풍노도의 계절이 물러간다고 한다. 지랄총량을 채우도록 놔두려니 여간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하다 못해 피아노 뚜껑을 열어 `도` 자리만이라도 열심히 닦아야 할 판이다. 누구는 부모교육이 어떻고, 나 전달법이 어떻고, 사춘기 매뉴얼이 어떻고. 에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너만 사춘기냐? 나는 갱년기다. 그래, 누가 센지 해보자." 직설화법으로 맞서보기도 한다.

청소년은 어린이와 다르다. 잊고 있던 내 존재를 찾는 시기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던가? 그 질문의 답을 찾다 기어이 알아냈다. 그래서 화가 나는 것이다. 엄마라는 우주선을 타고 각자 다른 행성에서 오게 된 외계인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이다.

처음 지구별에 왔을 때 그랬다. 모든 게 신기했고 궁금해서 끝없이 물었으며 다양한 능력을 가졌다. 기억해보자. 정말 그랬다. 나무들의 엄살에 호~입김을 불어넣어준 적도 있고 꽃들의 수다에 고개를 끄덕일 줄도 알았고 벌들의 날갯짓을 해독할 수도 있었다. 자기가 떠나온 행성의 언어를 고수하다가 아무도 못 알아듣자 울음을 삼키며 포기해야만 했다. 학습이란 이름으로 강요당하며 지구의 언어를 습득했고 호기심을 증발시켜갔다. 점점 지구인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게 너무나 억울한 것이다. 다시 타고 돌아갈 우주선은 비좁아 못 타게 되었고 돌려보내 줄 생각 같은 건 아예 없는 어른들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우주선에 태울 주인공들을 맞아들이기 위한 자신만의 우주선을 제작해야만 함을 깨달았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머지않아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니 분통이 터지는 거다. 정녕 내 별로 돌아갈 수 없는 건가? 애초 우주선에 타고자 했던 자신의 호기심을 탓 하다가 우주선에 태워주었던 부모님이 그토록 원한다면 내 별을 잊어 줄게요. 마지막 항변을 하는 중이다. 이후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태워올 가족을 위한 우주선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기 전 마지막 화풀이.

받아줘야지 어쩔 수 없잖은가? 본의는 아니었지만 납치해 온 우리들 부모의 책임도 있으니. 부디 튼튼한 우주선을 만들 설계도와 재료를 구하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얼마만큼 눈감아주기로 하자.

요즘 맥주 광고에 뭐라고? 가 유행이던데 어때서? 로 바꿔본다. 자는 게 어때서? 먹는 게 어때서? 꼬여서 뭐, 그게 어때서? 그렇게 꼬였을 때만 보이는 세상이 있다. 꼬였을 때만 해볼 수 있는 일이 있다. 누리고 즐기라. 그리고 어른 되거든 꼭 잊지 마시라. 그때를 잊어버린 어른만 이렇게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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