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화해 참여 소극적 태도 교회 자체 확장·보존만 힘써 민족 구성원과 공동체 명심 참된 평화실천 적극 나서야 "

한국 천주교회는 매년 6·25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이라 일컫는다.

전국 성당에서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기원하는 `9일 기도`를 바친 후 6·25를 맞이한다. 기도는 그것이 진심일 때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진심 어린 기도란 그에 따른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과거 지나온 여러 성당에서 `북한선교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기도하며 민족화해의 정신과 방안에 대한 연구토론을 진행하고 북한교회를 위한 기금을 적립하였다. 그 당시 교우들은 잘 따라주었지만 필자가 그런 성당들을 떠나온 후 모임이 해체되고, 모았던 기금도 다른 명목으로 전용되었다는 씁쓸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지금은 지역교회 성당의 사목을 담당하지 못하는 처지라서 그런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필자의 처지에서 다음과 같은 반성을 한국교회에 제의한다. 우리 민족의 반쪽을 위하여 그리고 그 반쪽의 복음화를 위하여 교회가 과연 어떠한 일을 어떻게 하여왔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교회는 우리 민족 전체와 한몸의 역사를 걸어왔는지를 우선적으로 반성하여 답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신앙의 선조들이 복음으로 우리 민족의 잠을 깨우고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하여 박해를 당하면서 순교로써 투신했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9세기 전반기까지는 박해 가운데 평신도들 스스로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1830년대 이후 주교 신부 등의 성직자(외국인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교계제도적 교회의 시대부터는 그 제도적 가르침에 순응함으로써 박해를 이겨나가는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시대를 지나오면서 조선 말기에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국권을 상실해가던 민족 구성원 전체의 비운의 시기에 교회는 민족과 운명을 함께하기보다는 교회 자체의 확장보존에 집착한 역사를 기록한다. 이는 교회가 그 제도적(교계적) 속성의 바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성을 역사적으로 노정하였다는 근원적 반성거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말기에 신교(信敎)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 이 나라 민족 전체의 고뇌를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그 후 일제의 강점시기에도 이 민족의 해방운동 노선에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였다. 교회가 일제 말기에는 일제의 침략정책에 협조하다시피 한 것이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에 교회는 민족 일치를 위한 노력을 실제적으로 소홀히 하였다. 해방 이후 주변 강대국의 한반도 분단정책과 더불어 민족 내부 정치집단의 좌우 혼란 시기에 교회 본연으로 반공노선에만 충실하였을 뿐 민족의 일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북을 버려둔 채 이남의 체제안전 속에서 70년 동안 교세 확장을 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교회는 이북을 망각하고 이남 안에서만 `한국교회`의 실체가 건재한 듯 70년을 살아온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반성과 더불어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복음 선포는 늑장 부릴 일이 아니다. 기다렸다가 여건이 호전될 때에 가서나 할 일이 아니다. 이북 당국이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용할 때에나 혹은 그쪽 공산정부가 망하고 통일된 후에나 복음 선포하러 갈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아닌 서양 선교사들도 갖은 악조건하에서 조선에 잠입하여 복음을 선포하다가 순교한 사실을 상기하여 오늘의 교회는 반성해야 한다. 분단 70년 동안 남한에서 비밀리에 북한으로의 목숨 건 선교사 파견을 시도해본 일이 있었던가. 이에 관하여 물론 제도권에서도 반성을 해야겠지만, `때`가 오기만 기다린다는 것은 부끄러운 우리 모두의 반성거리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을 기록할 역사에 대해서 미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 70년 동안 한 게 뭐냐." 그리고 그 미래는 덧붙여 질타를 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무서워서 반쪽 민족에 대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그쪽에 대고 삿대질만 했느냐." 오늘의 우리에게 미래의 후손들이 던질 이러한 질문을 상상하면 두렵기만 하다. 참담한 부끄러움뿐이다.

윤종관 천주교 하부내포성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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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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