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회체제들이 급변하는 현대에 이르러 여성의 교육기회와 사회진출의 증대, 핵가족화 현상, 성의 해방, 전통적 결혼제도의 불안정 등으로 인하여 성별에 대한 차별 현상이 감소되면서 성 역할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또한 20세기 후반의 문화 현상을 대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특징 중 다원주의, 절충이나 성의 해체 등은 성 개념과 관련하여 남성적인 이미지와 여성적인 이미지의 요소를 혼합하여 표현하는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성 역할의 변화나 포스트모더니즘, 테크놀로지의 발달 등 다양한 요인은 성의 혁명으로 이어져, 성에 대한 새로운 의식구조와 그에 따른 복식 현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남성적인 이미지는 강함과 우세함을, 여성적인 이미지는 연약함과 순종적이라는 대조적인 성적 고정관념을 지녀왔으나, 현대에 이르러 그 고정관념은 대조적이 아닌 혼합적인 양상으로 변화되어 현대 패션에 성 정체성의 표현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페티시즘(Fetishism)으로 페티시즘의 역사는 넓게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이 용어가 대중문화 속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로 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주로 인용되는 페티시즘은 성적 도착(perversion)의 의미로 신체의 일부 또는 특정한 사물에 대한 비정상적인 성적 애착을 느끼는 일종의 변태성욕 또는 성적 일탈(sexual deviance)의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자면 인간 이외의 여러 가지 종류의 구두나 스타킹, 가죽제품이나 또는 육체의 특정부분인 발꿈치나 무릎에서 성적인 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복식에서 성 도착적 이미지는 이성의 복식이나 특정 아이템에 성적 환상을 부여하고 관능적으로 연출하는 일련의 의복 행동을 의미한다. 페티시즘을 반영한 복식으로는 코르셋, 언더웨어, 스타킹, 하이힐, 긴 검정색 장갑, 가터 벨트 외에 공단이나 모피와 같은 소재, 단추 등을 들 수 있다. 코르셋은 허리를 타이트하게 조임으로써 극단적인 아우어 글래스 실루엣을 만들어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선호되어 왔으며, 페티시 패션에 있어 가장 중요한 테마로 활용되고 있다. 코르셋이 전성기였던 빅토리아 시대에는 여성의 이상적인 허리 사이즈인 14 내지 15인치로 만들기 위해 맨 아래 늑골을 제거하는 성형수술이 유행하는가 하면 지나친 신체 압박으로 목숨을 잃기도 하는 등 극단적인 사례도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패션의 주된 경향 중의 하나는 복식을 통한 성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여성 해방운동과 다양함을 인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 현상, 성 역할의 변화로 인해 양성의 공존 현상과 이성의 요소를 도입한 복식인 앤드로지너스 룩(androgynous look)이 등장하였다. 앤드로지너스(androgynous)란 남성인 앤드로스(andros)와 여성인 지나케(gynacea)의 합성어로 남자와 여자의 특징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앤드로지너스한 이미지는 1980년대부터 패션의 주제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전반에 걸쳐 여성들의 남성적인 테일러드 슈트, 매니시 팬츠, 넥타이, 셔츠 등 매니시 룩, 게이나 록 가수들의 여장, 여자처럼 화장을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 부르던 영국의 뮤지션 보이 조지와 같은 남성의 화장, 남녀의 구별 없이 자유롭게 입은 무대 의상, 다이애나 황태자비에 의해 유행된 짧은 머리 스타일 등은 앤드로지너스 룩을 새롭게 탄생시킨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90년 이후의 패션에 있어 앤드로지너스 룩은 1960년대 유니섹스 룩에서 벗어나 기존의 남성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패션 요소를 여성이 수용하고, 여성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 오던 액세서리, 메이크업, 장식화 경향을 남성이 수용할 기회를 제공하여 패션의 폭을 한층 넓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남성과 여성상의 관념을 뛰어넘어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의 요소를 복식을 통해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감각으로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할 수 있는 패션의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다.

박길순 충남대 의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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