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1관 관람기

 광복 70주년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제1전시실 전경.
광복 70주년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제1전시실 전경.
미술전시 관람에 정석이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없다. 처음 만난 이성을 차근차근 알아가듯, 미술 관람도 마찬가지다.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하느냐에 따라 작가가 보이고, 그림이 보인다. 지난 23일 막을 올린 광복 70주년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총 5개 섹션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는 66인의 거장, 162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그동안 한국근현대 미술사가 걸어온 발자취를 모르고 지나쳤다면, 이번이 기회다. 많은 작품에 미리부터 겁낼 필요는 없다. 5회에 걸쳐 매주 한 관씩 소개되는 작품을 미리 보고, 미술관을 찾는다면 어렵다는 편견도, 주눅 들 일도 덜할 것이다. 미술관 관람객의 동선에 따라 1관(계승과 혁신)을 살펴봤다. 1관은 수묵과 채색이 공존하는 한국회화의 전통이 혁신적 예술가들의 시대를 거치면서 계승의 관점과 혁신의 관점으로 진화해온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1관 입구에 들어서니 좌측으로 붉은색 벽면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몇 걸음 발길을 옮기니 조선왕조의 마지막 화가 오원 장승업의 `잡화십곡병` 병풍 앞에 발길이 멈춘다. 어깨 너머 그림을 배웠지만 산수, 인물, 사군자 등 모든 분야를 다뤘던 다재다능했던 화가 장승업. 1879년 여름에 그려진 이 작품을 보고 있자니, 활기왕성한 36살의 나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바위에 걸터앉아 날렵하고 힘찬 필법을 뽐냈던 영화 취화선의 장승업(최민식)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장승업의 옆에는 그의 제자 안중식과 조석진이 작품이 나란히 걸려있다. 안중식이 1918년에 그린 `옥류동`은 `자연을 그냥 화폭에 담았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조석진의 `산수`는 실경산수에 화가의 생각이 더해진 느낌을 준다. `그래~이것이 우리나라 전통화법이로구나.`

담백한 색채도 잠시, 화사한 색채감으로 시선을 끌어 다가가보니 우리나라 채색화의 대가 이당 김은호의 `미인도`가 발길을 붙잡는다. 인물화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황제의 어진을 그렸던 김은호. 미인도에서 볼 수 있듯이 여인을 부드럽고 섬세한 묘법으로 표현했는데, 딱 봐도 일본 화풍이다. 탁월한 재주탓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그림 주문을 피해 갈 수 없어 친일 행각으로 몰리는 불운을 안았던 화가. 신이 내린 재주를 버릴수도, 내세울 수도 없었던 그의 고뇌가 작품속에서 느껴진다.

이어진 작품은 충청남도 공주출생인 청전 이상범의 산수 두점.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서화를 배운 탓일까. 향토적인 소박한 자연에 마치 안개가 낀 듯한 적막한 느낌을 주는 `청전화풍`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벽을 타니 이상범과 쌍벽을 이루던 변관식의 후기 작품, 1971년에 그려진 `유시도원`이 펼쳐진다. 조석진의 외손자인 변관식은 타고난 반항의식으로 가득했고, 그런 투박한 미감은 작품속에 고스런히 녹아들어있다.

자연스럽게 뒷 걸음이 쳐졌다. 파노라마로 펼쳐진 조평휘의 `군봉`을 보기위해서였다. 장대한 장관, 박진감 넘치는 화면에 그만 넋이 나가버린다. 심양 박승무의 고요한 `설청`은 다소 후텁지근한 미술관 공기에 시원함을 불어넣어준다. 뒤를 돌아 맞은편 공간을 바라보니 조석진, 안중식의 문하생이었던 이도영의 `칼`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대각선의 형국을 이루면서 시원하게 뻗어있다. 그 옆에는 김규진의 `묵죽도` 두 점이 기다리고 있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배운탓에 뛰어난 필력이 눈부시다.

`우와~` 감탄사가 나와야 할 타이밍이다. 운보 김기창의 `점과 선 시리즈 ll`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충남 공주 출신인 김기창의 말년 작품인 점 시리즈는 페인트 붓과 대걸레를 사용한 작품으로, 작가가 어떻게 작업을 했을지 상상력이 펼쳐지는 행복한 시간을 안겨준다. 그 바로 옆 이어지는 벽면에는 김기창의 부인 우향 박래현의 `작품 16`이 걸려있다. 직선과 원으로 구성해 자칫 딱딱할 수 있는 화면을 먹의 번짐과 노랑, 빨강, 검정의 색채 대비를 통해 서양화에서난 봄직한 구성을 펼쳐보인다. 한국화가 현대적으로 변모해 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아닐까.

대각선 흰색 벽면 안쪽에는 천경자의 작품이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채색기법이 몽환적인 여배우의 특징을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절이나 신당에서 주로 사용하는 오방색으로 칠해진 이미지들을 보고 있자니, 그 강렬함에 그만 `얼음`이 되고 만다. 일본 유학 이후에도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지 못하다 70대가 돼 찾아낸 민화풍의 채색을 한국의 무속화와 결합해 오방색의 강렬함을 입힌 그의 화풍은 80이 돼가던 시기에 완성해낸다. `뜻한바를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좌절하지 말지니`. 박생광 작품이 주는 교훈이다. 다시 등장한 붉은 벽에는 남관이 1967년 그린 `태고`가 있다. 동양의 정서와 고대의 전설을 혼합한 작품은 마치 깊은 숲에서 발견한 바위 위에 새겨진 흔적과 같이 보인다. 바로 옆에는 얼핏 그 외형이 닮은 고암 이응노의 `추상`이 자리한다. 이 추상은 어디까지나 문자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남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위치하며 정신을 표출하는 기호로 존재한다.

마지막 작품은 유산 민경갑의 `산울림95-4`다. 그런데 기존의 한국화에서 봤던 산야의 모습이 아니다. 구상과 추상성의 경계에 있는 색면화로 붉은 하늘과 검고 회색의 기운이 드리운 화면을 가늘게 찢겨진 듯 생겨난 하얀 틈새는 작품이 주는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 여운을 남긴다. 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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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업의 '잡화도 10곡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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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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