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장미정원 일부 모습
장미정원 일부 모습
짙다. 장미라는 꽃의 느낌이다. 꽃잎의 우아한 모습은 향기와 색감을 더욱 짙게 만든다. 청순보다는 섹시함이, 진실보다는 거짓이, 공주보다는 여왕이 먼저 생각나는 꽃이다. 오월에 들어서면 장미는 절정에 달한다. 생김새 답게 사람들이 던지는 찬사도 멋지다. `오월의 여왕`이다. 여왕을 만나러 기차를 타고 남도로 향했다. 아직 봄기운에 여실한 이 곳에서 남도는 더 짙은 신록으로 가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봄의 절정은 그 곳에 있었다. 전남 곡성은 장미향 가득한 오월의 왕국이었다.

△곡성 세계장미축제= 섬진강 기차마을 장미공원에서 이달 31일까지 열리는 세계장미축제는 세계 각국 1004종, 3만8000주의 장미를 감상할 수 있는 축제다. 말 그대로 `각양각색`의 장미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며 발길을 잡는다. 약 4만㎡ 부지의 장미공원은 천천히 산책 삼아 둘러보기에 딱 좋다. 사실, 이름난 축제나 박람회를 가보면 사람에 치여 지치거나 애매한 동선 짜임으로 다 둘러보기도 전에 질리는 경우가 많다. 인위적인 조형물이 오히려 관람을 방해하기도 한다. 곡성 장미축제에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직 장미의 향기만으로 축제를 알차게 채워놨다.

그렇다고 즐길 거리가 정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앙무대에서는 날짜별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각종 연주, 무용 공연은 물론 화려한 장미 퍼레이드까지 다채롭다. 크지는 놀이공원과 동물농장도 있다. 공원 한쪽에 마련된 생태관이나 더위를 식혀줄 분수 쇼도 인기 만점이다. 주말에 갔다면 4D 영상관 관람도 가능하다. 공원 한 바퀴를 편하게 돌 수 있는 미니기차는 대기 줄이 길기 때문에 탑승하고 싶다면 매표를 서두르는 것이 좋다.

△전국 유일 증기기관차= 장미 공원을 산책하다 보니 미리 예매해 둔 증기기관차 탑승 시간이 가까워 졌다. 승강장인 구 곡성역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을 그대로 사용해 그 자체로 훌륭한 구경거리 역할을 하고있다. 승강장에 도착하니 3량짜리 기차가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증기기관차의 이동 거리는 길지 않지만 어른들에게는 추억을, 아이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을 선물하기에 충분하다. 80년대 생인 기자에게도 증기기관차는 낯선 경험이었다. 10㎞를 달리는데 30여분이 걸린다는 것은 대전에서 서울까지 50분이면 도착하는 이 시대에 어색할 정도로 느린 속도다. 게다가 자갈길을 오토바이로 달리는 것 같은 덜컹거림이라니.

하지만 창밖 섬진강을 보고 있노라면 이 어색한 느림에 감사하게 된다. 햇볕이 반짝이며 부서지는 물길, 살랑거리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 느리기 때문에 누리는 혜택이다.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의 덜컹거림도 정겹다. 어쩌다 보니 동석 하게 된 50-60대의 단체 관광객들은 앞다투어 각자의 추억담을 풀어 놓는다. 광주에서 왔다는 그들은 왁자지껄 수다를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탁 트인 섬진강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잠시 대화를 멈췄다. 그리고 너도 나도 "다음엔 가족과 와야 겠다"고 입을 모은다. 소중한 사람이 떠오르는 곳, 섬진강은 그런 곳이다.

증기기관차 표는 섬진강 기차마을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매할 수 있으니 시간과 좌석을 확인하고 미리 예매하는 것이 좋다.

△레일바이크 타고 도는 섬진강= 기차마을 안에서도 레일바이크를 탈 수 있지만 이왕이면 시간을 더 내어 섬진강 레일바이크를 타 볼 것을 권한다. 레일바이크 표를 예매했다면 기차를 타고 가정역 전 역인 침곡역에서 내리면 된다. 2인 혹은 4인용 레일바이크가 준비돼 있으니 연인 또는 가족, 친구와 함께 온 여행객들에게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레일바이크는 기자의 저질체력으로 인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가정역에서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레일바이크 이용객들이 역으로 들어섰다. 혼자 온 기자에게 한 중년 여성이 "기념사진 좀 찍어 달라"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웃으며 사진을 찍어 줬더니 줄지어 오는 사람들마다 핸드폰을 내미는 바람에 졸지에 가정역 아르바이트생이 되어버렸다. 중년의 단체 관광객들이 "덥고 힘들다"고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것으로 보아 정말 쉽지 않은 길인 듯 했지만 함박웃음이 떠나질 않는 것을 보니 `가치있는 땀` 이었음이 분명하다.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그 길은 분명 아름다웠으리라.

△시간이 멈춘 가정역= 종착역인 가정역에서 멈춘 기차의 정차 시간은 30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승객들은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긴 뒤 돌아가지만 기자는 일부러 2시간여 뒤에 출발하는 다음 기차표를 끊었다. 섬진강을 충분히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가정역에는 별다른 즐길 거리가 없다. 역 반대편으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어딘가에서 `출렁다리`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전혀 출렁이지 않을 것처럼 튼튼해보였다. 하지만 중간까지 걸어가니 정말 출렁임이 전해졌다. 삐걱거리는 나무다리와는 또 다른 짜릿함이 느껴졌다.

강변으로 내려와 큼직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을 멍하게 섬진강을 바라왔다. 창밖으로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백두부터 한라까지 분명 같은 물줄기일 텐데 강물들은 저마다 느낌이 다르다. 섬진강은 유독 잔잔하고 포근하다. 조용한 물소리와 적당히 따가운 봄 볕, 그리고 강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있었다. 숨죽인 듯 흐르고 있는 강물을 보는 것 만으로 허전했던 마음이 점점 채워지는 느낌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신호 같았다.

여행지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부터 고요한 물소리도, 낯선 덜컹거림도, 장미의 달콤한 향기도 추억이 된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스쳐가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색깔과 향기를 입히는 것은 떠나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글·사진=김대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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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장미정원을 찾은 어린이들이 장미꽃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22일 시작된 곡성세계장미축제는 이달 31일까지 섬진강 기차마을 일원서 열린다.
지난 22일 장미정원을 찾은 어린이들이 장미꽃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22일 시작된 곡성세계장미축제는 이달 31일까지 섬진강 기차마을 일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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