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신작 백운학 감독 악의 연대기

장대 같은 비가 오던 어느 날 밤. 한 소년이 형사들에게 연행되는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소년은 말한다. "나는 살인마의 아들이었다"라고. 이 순간 많은 관객들이 감독의 출제의도를 직감한다. 이후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저 아이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 이 영화의 숙제라는 것을….

많은 복선을 담은 첫 장면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영화의 시간은 20여 년이나 훌쩍 흘러버렸다.

영화의 주인공 최창식(손현주)은 특진을 앞두고 있는 잘나가는 강력계 반장이다. 최근 대통령상을 수상한 그는 큰 사고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토록 기다렸던 경찰청 본청으로 영전할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꼬이기 시작됐다. 회식 후 홀로 집으로 돌아가던 택시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창식은 택시가 전혀 이상한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택시기사에게 원래 목적지로 차를 돌리라고 하지만 택시는 외곽을 향해 내달린다.

의문의 괴한에게 납치돼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창식은 자신을 죽이려는 남자와 몸싸움을 벌이던 중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승진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기로 한다.

다음날 아침, 창식은 자신이 근무하는 경찰서 바로 앞 공사현장에 설치된 고공 크레인 위에 매달린 괴한의 시체를 본다.

엽기적인 범행 방식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히고 사건의 범인을 체포하는 데 인력이 총동원된다. 최 반장은 수사망을 좁혀오는 동료들의 움직임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한편, 자신을 궁지로 몬 범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혼자만의 수사를 시작한다.

영화는 전개과정에서 기존의 다양한 한국 스릴러 영화들을 연상하도록 한다.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복수의 대상이 된 남자.

베일에 쌓인 복수의 주체가 짜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그 대상이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는 점은 자연스럽게 `올드보이`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경찰인 주인공이 자신의 우발적인 범행을 숨기기 위해 또 다른 범행을 반복하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전개는 `끝까지 간다`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영화는 앞의 두 영화와는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는데 먼저 올드보이가 `사적복수`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악의 연대기`는 주인공을 경찰로 설정해 복수의 영역을 모호하게 만든다.

또한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황당한 상황들과 의외로 `허당`같은 주인공으로 인해 영화의 감정선을 따라가기에도 바빴던 `끝까지 간다`와 달리 행동보다는 상황을 관망하며 신중하게 대응하는 창식으로 인해 영화는 화려한 액션보다는 인물의 심리적 묘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같은 창식의 대응 방식은 스릴러 장르 특유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는 장르 특유의 매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재미의 반감 요인이 되지만 의도치 않게 창식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을 명확하게 만든다. 문제가 됐던 20여년 전 그 사건을 제대로 수사했다면, 아니면 우발적 살인 이후 곧바로 자수를 했다면….

악의 연대기라는 제목과 달리 영화에는 두드러지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선인과 악인의 경계가 모호한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악인들 사이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되는 `악`을 이야기하는 스토리도 좋고, 경쟁하듯 잔인한 장면이 반복되는 최근 한국 영화와 달리 특별히 잔인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에 충분하다.

반면 이러한 장점들이 반대로 아쉬운 점이 될 수 있다. 이야기의 구성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모두 정형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반전을 위한 복선 역시 스릴러 영화치고는 너무 친절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제 몫을 다 해내는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 믿고보는 배우 손현주는 초반 잘나가던 모습부터 살인사건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는 역할까지 최 반장의 내면을 부족함 없이 소화해낸다. 또한 마동석과 정원중은 물론 최 다니엘과 박서준 역시 섬세한 연기를 펼친다. 오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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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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