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의 '농다리'는 교각이 28개에 달하는 돌다리다. 농다리는 1000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그 냇물 위에 버티고 있다.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의 '농다리'는 교각이 28개에 달하는 돌다리다. 농다리는 1000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그 냇물 위에 버티고 있다.
`생거진천(生居鎭川)`.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좋은 곳. 땅에서 나는 쌀도 기름지고 물에서 나는 고기 맛도 찰진 그곳. 이름 그대로 살맛 나는 곳. 충북 진천은 보석같은 아름다움이 조용히 스며있는 곳이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흐렸지만 밝았던 날씨는 그나마도 미세먼지 때문에 누렇게 변해버렸다. 안개가 낀 건지 구름이 낀 건지, 혹은 모래가 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숨 가쁜 그날의 일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막상 도착한 진천은 뿌연 날씨도 가리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사방에 퍼져있었다. 먼지로 콧속은 매웠지만 시원하게 부는 바람은 기분 좋았다. 안개 낀 저수지 너머의 산은 달큰한 운치가 있다. 운 좋은, 혹은 운 나쁜 5월의 하루. 진천은 그렇게 다가왔다.

◇오래된 터와 새로운 건물의 만남, 보탑사를 가다="따다다다다다닥…" 10여 년 만에 듣는 익숙한 소리다. 잊고 살았던 딱따구리다. 산이 좋으니 새가 많다. 흡사 새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진천읍 연곡리의 보탑사는 보련산 중턱에 있다. 1996년 비구니 스님인 지광·묘순·능현 스님이 창건했다. 절의 역사는 짧지만 터에 담긴 이야기는 길다. 절터가 고려시대부터 전해져오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서로운 터 덕분인지 목조 건물들은 웅장한 맛이 진하다. 모든 건물 곳곳에 스님들의 정성스런 손길이 온전하게 담겨있다. 현대에 지어졌지만 오래된 냄새가 나 반갑다.

입구인 `천왕문` 밖에는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관광 온 사람들은 이 나무 아래서 지친 다리를 달랜다. 앉은 자리서 일어날 줄을 모른다. 한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앓는 소리를 낸다. 찡그린 얼굴 너머로 미소가 보인다.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천왕문을 지나면 소나무 사이로 절 내부가 보인다. 안뜰로 향하니 두번째 입구로 보이는 누각이 양 옆에 지어져 있다. 밖에서 볼 때 목탑과 어우러져 사찰의 웅장함을 배가시켜주는 건물이다. 안뜰에 들어서면 둘레를 따라 심긴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가지마다 작은 연등이 달려있다. 앙증맞은 크기의 연등은 사람들의 소원을 적어 놓은 종이가 붙어있다. 합격 기원, 가족 건강 등 소박하지만 간절함이 묻어난다.

새들을 따라가면 3층 목탑이 있다. 높다란 지붕 곳곳에 집을 지어 놨는지 조그만 틈바구니로 쉴 새 없이 드나든다. 절 한가운데에 있는 목탑은 하늘을 향해 웅장하게 뻗어있다. 높이가 52.7m에 달해 그 자체만으로 압도적이다. 사실 말이 좋아 목탑이지 대웅전이 들어있는 주 건물이다. 때문에 날씨가 나빠도 그 위용을 가릴 수 없다. 이 엄청난 건물에 단 한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다.

목탑 오른쪽에는 열반에 이른 부처님을 모신 `적조전`이 있다. 하지만 적조전 앞에 있는 작은 돌부처 상에 눈길이 갔다. 돌부처는 바위 틈에 피어난 작은 꽃을 말 없이 바라보고 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고 했던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작은 꽃을 바라보는 표정이 너무나도 흐뭇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굽이치는 냇물에서 1000년을 버틴 돌다리=진천은 산골 굽이굽이 물이 가득해 저수지가 많다. 거대한 저수지는 끝이 없어 호수같다. 산을 지나는 물과 함께 땅을 따라 흐르는 냇물도 풍부하다. 흐르는 냇물은 수 천년 동안 말이 없다.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의 `농다리`도 1000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그 냇물 위에 버티고 있다.

이름의 유래는 분분하다. 물건을 넣는 `농`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용(龍)`자가 와전돼 `농`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래야 어떻든 냇가에 단단히 박혀있는 농다리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가교다. 그리고 함께 걷는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다.

다리 근처에 도착하니 시원한 물소리가 귓속을 채운다. 흐르는 냇물이 교각을 빠져나오며 내는 굉음이다. 웅장한 자연의 교향곡에 어깨가 살짝 움츠러든다. 소리를 뚫고 가까이 가면 낯선 소나무가 반긴다. 줄기가 누워 있어 `v`자 형태로 큰 가지를 뻗은 모양새다. 고개를 들면 건너편 산 중턱에 있는 정자가 보인다. 그리고 왼쪽을 보면 길다랗게 농다리가 놓여 있다.

농다리는 단순한 돌다리일 뿐이지만 예사롭지 않다. 가공을 전혀 하지 않은 두터운 돌 수천 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교각은 28개다. 튼튼한 것이 성인 남자 3명이 감싸도 모자랄 정도다. 위로는 너비가 1m 정도 되는 널찍한 바위를 올려 놓았다. 돌 널은 흔들거리지만 단단하다. 10명이 올라가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단단하지만 흔들리는 느낌 때문에 걷는 재미가 있다.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 새 건너는 것은 순식간이다.

농다리를 지나 산을 넘으면 드넓은 초평저수지가 나온다. 초평저수지는 충주호와 더불어 강태공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낚시터다. 날씨가 나빠 멀리 보이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운치가 있다. 저수지를 낀 산마루는 안개에 싸여 있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동양화와 같은 절경에 숨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수지 표면을 종이 삼아 한시(漢詩) 한 편을 짓고 싶은 기분이었다.

◇박해를 견딘 천주 신앙의 요람 배티성지=지난해 천주교 성지 기사를 준비하며 참 많은 장소를 다녔다. 근방에 있음에도 가지 못한 곳도 물론 있다. 그래서 마지막 여정은 배티성지로 정했다. 배티성지는 `땀의 전도사` 최양업 신부가 사목의 중심지로 삼은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이어지는 탄압의 기간동안 신자들이 숨어 살던 곳이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곳곳에 인내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늦은 시간에 방문해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성지가 넓어서 이곳 저곳에 방문객이 퍼져 있기 때문일 것이라 위로한다. 공식적으로 조성된 `성지`에는 성당과 박물관 등이 있다. 하지만 다른 곳에 눈길이 쏠린다. 조금 더 이동하면 조선 최초의 신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단출한 초가집이다. 초가집 문을 열고 들어가 기도를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간다. 장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동상일 뿐이지만 경건한 마음이 든다. 박해 시절 그와 교우들이 겪었을 고통이 느껴져 신자가 아님에도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신학교를 나와 1.2㎞ 정도 이동하면 이름 없는 순교자 14인의 무덤이 있다. 성지 쪽에 조성된 곳과는 다른 무덤이다. 산자락에 조용히 묻힌 순교자들은 아무도 찾지 않는 것 같다. 도로에서 50m 정도의 산길로 들어가면 이들의 무덤이 있다. 헌데 맨 앞 묘지에 꽃이 놓여 있었다. 그들의 숭고한 죽음은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잠든 그들의 무덤 앞에 살며시 들꽃 하나를 놓았다.

물 많고 산 좋은 진천의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산길 따라 걷다 보면 고요한 그 모습에 반하지만, 박해를 견딘 신자들의 열정 덕분인지 뜨거움도 느낄 수 있다. 아름다움, 혹은 뜨거움. 기억한다. 그곳은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진 곳이었다는 것을. 글·사진=전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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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를 나와 1.2㎞ 정도 이동하면 이름 없는 순교자 14인의 무덤이 있다.
신학교를 나와 1.2㎞ 정도 이동하면 이름 없는 순교자 14인의 무덤이 있다.
진천읍 연곡리의 보탑사는 보련산 중턱에 있다. 1996년 비구니 스님인 지광·묘순·능현 스님이 창건했다.
진천읍 연곡리의 보탑사는 보련산 중턱에 있다. 1996년 비구니 스님인 지광·묘순·능현 스님이 창건했다.

전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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