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말 삶과 죽음을 갈라놓을 수 있어 국민을 어루만지는 바른 정치 희망·용기를 주는 사회 기대 "

최근 어느 기업인의 자살로 인해 나라가 어지간히 시끄럽다. 주머니 속에 남긴 비자금 리스트가 복수를 부르는 유언(遺言)이 되어 벌써 몇 사람이나 낙마시키고 낙상(落傷)의 흔적을 깊게 파이게 만들 기세이다. 얼마나 억울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읍소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동정론과 그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과연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에 대한 회의론이 교차하는 것 같다.

언론은 온통 3000만 원부터 수억 원에 이르는 비자금의 행방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 같은데 그 기업이 끼친 손실이 무려 1조 1000억 원에 달한다는 문제는 왜 중요하게 부각시키지 않는지 정말 궁금하다.

연일 TV와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위 사건과 별도로 며칠 전 잠깐 스치듯 신문에 실렸던 사진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다.

서울 마포경찰서 용강지구대 배보영(26) 순경이 자살하려는 여고생을 무사히 가족에게 돌려보냈다는 기사였다. `우산을 쓴 채 30분 가까이 한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인지 A양이 앉은 곳만 물에 젖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일 있니? 언니와 같이 걸을까?" 배 순경이 A양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눈을 감은 채 울고 있던 A양이 "언니, 저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죽기 싫어요"라고 입을 뗐다.`

통계적으로 볼 때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보통 6-7번 시도 끝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주변에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6-7번이나 극단적 선택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언니, 저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죽기 싫어요."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붉은 복숭아처럼 부어 있던` 여고생 A양의 이 말이야말로 삶의 마지막 벼랑 끝에 서게 된 사람의 가장 솔직하고 가장 안타까운 말일 것이다.

위의 기업인의 경우도 TV 화면에 오열하는 장면이 반복될 때마다 여고생 A양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심정이라 생각되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기업인의 자살 사건과 여고생 자살 미수 기사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하나는 국가 전체에 큰 파장을 던졌고 다른 하나는 주변 사람에게만 경종을 울렸을 뿐이다.

무엇보다 제일 큰 차이는 한 분은 유명을 달리했고 다른 한 사람은 생명을 건졌다는 점이다. "너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한 명이면 된다"는 배 순경의 말에 힘을 얻은 여고생 A양은 무사히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었다. 목숨을 끊은 기업인이 마지막까지 권력의 실세 되는 어떤 분의 집 근처에서 배회했었다는 기사를 접하니 그분도 자기 말을 들어주고 자기를 위해 울어줄 한 사람을 애타게 찾다가 좌절했을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사업 목적을 위해 아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정작 필요할 때 도움을 받지 못했던 기업인과 학교에서 왕따였고 친구도 없었지만 결정적 순간에 따뜻한 말을 전해주는 한 사람을 만난 여고생은 각각 생사의 다른 결과를 얻게 되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 비자금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울 전망이다. 정치가의 이름들이 굴비 두름 엮듯이 어지럽게 등장하겠지만 사실 일반인의 눈에는 이 굴비가 저 굴비와 이름만 다르지 결국 똑같을 뿐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말 정치가 사람을 죽이는 정치가 아니라 살리는 정치가 되고, 다스리는 것(政)이 바로잡는 것(正)이 되었으면 하는 점이다. 안 그래도 실망할 일이 많은 국민에게 바라볼 희망을 주고, 살기 빡빡한 삶에서 뺄셈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덧셈이 가능한 생활을 만들어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예레미야 5:1) 죽음의 문턱에 설 정도로 억울하고 절망한 이에게 말을 건네주고 들어줄 그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우리 사회는 보다 훈훈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짙다.

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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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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