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보리암서 내려다본 다도해 풍경 장관
보리암서 내려다본 다도해 풍경 장관
살랑살랑 봄바람이 콧구멍을 자극한다. 연둣빛이 남아있는 이 계절이 가기 전에 콧구멍에 바람 좀 넣으라며 재촉한다. 어디로 갈까. 내 눈은 자연스럽게 남쪽을 향했고, 연두빛이 도는 봄철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경남 남해로 내 마음에 점을 찍었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진주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3시간 반 만에 도착한 남해. 남해대교를 건너니 이 곳이 왜 예로부터 유배지였는 지 알 듯 했다. 한양에서 멀기도 멀었을 뿐만 아니라 뱃길이 아니면 육지에 닿을 수 없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땅이었던 것이다.

남해의 봄은 역시 빨랐다. 산은 녹색과 연두색, 거기에 산벚나무의 연한 분홍빛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었고, 들판은 초록색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남해의 특산품인 마늘이 이미 아이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전날 밤 묵은 힐튼남해리조트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큰 남해도를 한 바퀴 빙 돌기로 했다. 첫 방문지로는 가천다랭이마을을 택했다. 미국CNN에서 선정한 `한국여행 중 꼭 가봐야 할 곳`에서 3위에 오른 가천다랭이마을. 사진 속의 가천다랭이마을은 영락없이 중국 윈난성의 시솽반나와 필리핀의 세계 최대 계단식 논인 바나웨이를 닮아 있었다. 가파르게 비탈진 땅이라는 혹독한 자연환경을 일군 인간의 절절한 삶의 흔적이 배어 있기에 더욱 감동으로 다가왔다.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것일까. 가천다랭이마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애걔`라는 실망스러움이 먼저 앞섰다. 거대한 규모의 산비탈에 높낮이가 확실한 계단식 밭을 기대했는데 실상은 달랐다. 규모도 그리 크지 않고, 무엇보다 계단식 밭의 형상이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았다.

실망감을 안고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좇아 해안 바위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돌아봤다. 그랬더니 다랭이밭의 모습이 보였다. 화려하지도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다랭이밭의 아름다움은 이미 가슴 깊숙한 곳까지 전해졌다.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저 가파른 비탈길에 밭을 만들기 위해 하루종일 호미와 괭이질을 했을 이 땅의 주민들을 생각하니 코끝이 찡했다. 다랭이밭이 관광객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이 땅을 일군 주민들에게는 처절하고도 절절한 삶의 공간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유채꽃의 진한 향기 사이로 로즈마리향이 시원한 바닷바람 사이에 간간이 끼어들어 봄의 정취가 더욱 풍성해졌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다 보니 등줄기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잠시 쉬었다 가야겠다 하던 차에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탤런트 박원숙씨가 운영한다는 `카페 앤 스토리`. 가천마을 중턱에 자리 잡은 `카페 앤 스토리`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바라본 남해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은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듯 싶다.

가천다랭이마을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찾은 곳은 한려해상국립공원 내 위치한 금산 보리암. 조선을 개국하기 전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올린 곳으로 유명한 금산의 꼭대기에 위치한 보리암은 강원 양양 낙산사 홍련암, 경기도 강화군 보문사와 함께 전국 3대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기도의 효험이 좋다는 소문난 탓인지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보리암 1주차장격인 복곡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편도 1차로 도로가 꽉 막혔다. 보리암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차를 돌려서 나갈까를 몇 번이나 고민했는 지 모른다. 언제 남해에 또 오겠느냐 싶어 마음에 참을인(忍)자를 새기며 복곡주차장까지 다다랐다.

보리암을 찾는 관광객들이 워낙 많다 보니 복곡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왕복 2000원을 내고 셔틀버스를 올라 타니 보리암 주차장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는 또 10분정도 걸어서 올라가야만 한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보리암을 찾는 지 궁금했는데 보리암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눈 앞에 펼쳐진 다도해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미조항 너머로 호도, 애도, 사도, 미조도 등 10여개의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데 그 모습이 바다라기 보단 작은 호수같은 느낌이었다.

보리암에서 108배를 올린 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남해는 자연환경도 뛰어나지만 다양한 콘텐츠로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독일마을이다. 다도해를 품에 안은 삼동면에 자리한 독일마을은 독일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아니라 1960-1970년대 외화를 벌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고국에 돌아와 정착한 마을이다. 2002년부터 입주를 시작해 현재 35가구의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들이 이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언덕으로 향하는 좁은 길을 따라 흰색의 외벽에 오렌지색 지붕을 한 독일식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그 모습은 독일 슈바르츠발트에 있던 트리베르크의 작은 마을을 연상시켰다. 이런 이국적인 풍경 때문인 지 수 많은 관광객들이 독일마을을 찾고 있다. 독일마을은 이미 남해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독일마을에서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남해파독전시관이다. 당시 서독에서 상업차관을 들여오는 조건으로 7936명의 광부와 1만1057명의 간호사들이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났다. 지하 1200m의 갱도에서 일하고, 거동을 하지 못하는 중증환자들을 돌보며 번 돈을 본국에 송금했다.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이들이 보내온 돈은 자그마치 1억153만달러나 됐다. 당시 우리나라 총 수출액의 2%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죽음을 넘나들며 번 이 돈이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들의 삶을 담은 영상물을 보다 보면 어느새 뺨 위에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진 나라인데…."

이번 남해여행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개척해 땅을 일군 우리 선조들과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파독광부와 파독 간호사들의 삶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여행이었다. 글·사진=한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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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진 산에 일군 삶의 흔적에 뭉클
비탈진 산에 일군 삶의 흔적에 뭉클
4월의 남해에는 이미 봄이 가득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일궈 만든 가천다랭이마을에도 노란 유채꽃이 만발했다.
4월의 남해에는 이미 봄이 가득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일궈 만든 가천다랭이마을에도 노란 유채꽃이 만발했다.

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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