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아는 멋집 8 대전 대흥동 하얀책상

테이블 위에는 메모지와 필기구가 놓여 있다.
테이블 위에는 메모지와 필기구가 놓여 있다.
책상 위는 매 번 지저분했다. 읽다 만 책, 빈 컵, 색 바랜 종이, 구겨진 영수증까지. 어머니는 책상을 정리하라며 핀잔을 주셨지만 나는 `생각의 흔적`이라고 핑계를 댔다. 책상은 공식적인 생각의 공간이다. 길을 걸으면서, 샤워를 하면서 하는 생각들과는 다르게 진취적이고 명확하며 깊은 판단을 내리는 곳이다. 보다 무거운 생각들이다. 때문에 어렸을 적 그토록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게 싫었나보다.

중구 대흥동의 하얀책상(대전 중구 대흥동 129-1) 앞에 앉았다. 생각이 복잡해서 들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입구에 쓰여 있는 한 편의 시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사람들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오늘은 학교에 가서/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라고`(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전문)

문을 여니 커피를 볶는 로스트기가 손님을 맞는다. 왼쪽으로는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한 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책장이, 오른쪽으로는 이 곳을 지나쳐간 손님들의 메모가 벽면에 붙어 있다. 어른 걸음으로 열 발자국 정도의 넓이니 아담한 편이다. 짙은 잿빛의 콘크리트 벽면을 양 옆에 두고 나무로 된 테이블과 집기들이 자리하고 있다. 군데군데 연필이 놓여 있고 공중전화기도 손님을 기다린다. 한쪽에는 타자기도 놓여 있다. 꾸밈 없는 소품들은 자연스레 앙상블을 이룬다. 양전모(34) 사장의 솜씨다. 양 사장은 지난해 회사를 나와 카페를 차렸다.

"직장을 다닐 적에 너무 힘든 일이 있어서 무작정 길을 걸은 적이 있어요. 걷다가 잠시 어떤 소파에 앉았는데 절 포근하게 감싸 안는 것 같더라고요. 그때 회사를 나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처럼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게 하얀책상의 콘셉트입니다."

하얀책상은 단순하면서도 유쾌하다.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긴 테이블은 벽돌 위에 나무 판자를 올려놨다. 벽에 걸려 있는 액자는 누군가 밖에 내어 놓은 것을 재활용했다. 일부 의자도 재활용품이다. 가지각색의 모습에 작은 웃음이 났다. 양사장은 설명 중 갑자기 천장의 조명을 가리켰다.

"저게 뭔지 아세요? 빨래할 옷들 넣어 놓는 통인데요. 천이 찢겨져서 버린 걸 가져왔어요. 나무 뼈대만 남은 걸 조명에 걸쳐놨죠. 그럴싸한 조명이죠? 아직 쓸 만한 물건들인데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보시면 알겠지만 의자도 세트가 아니라서 각기 달라요"

테이블, 아니 책상에 앉았다. 메모지와 필기구가 눈에 띈다. 다른 책상 모두 메모지와 필기구가 놓여 있다. 손님들은 이 곳에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면서 낙서를 하거나 글을 적는다. 테이블보다는 책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같이 앉아도 되는 책상이다. 저마다의 기록을 남긴 후 메모지를 찢어 벽에 붙인다. 누군가는 멋들어진 그림을 벽에 남겼다. 이 곳을 스쳐간 생각의 흔적들이다.

벽면 곳곳에는 캘리그라피가 곁들어진 시들이 걸려 있다. 양 사장이 직접 지은 시들이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는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를 쓰기도 한다. 얼마 전 부터는 손님들에게 브런치도 선보이고 있다. 양사장이 직접 돈까스를 만들었다. 그런 바람에 소수의 손님들에게만 예약제로 운영된다. 바삭한 튀김옷 속으로 고기의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진다. 이 밖에도 지하에 다른 공간을 준비 중이다. 지역의 젊은 작가들의 소규모 전시회 공간으로, 인디밴드들의 공연 공간으로도 만들 계획이다.

"책상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한 가구지만 사람들은 책상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하고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깨끗한 하얀 책상에서 좋은 결정들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상호를 지었어요. 편하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이란 말이죠. 아날로그 감성입니다."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지저분한 책상을 치웠다. 말끔한 책상이 하얗게 느껴졌다. 책상 위는 새로운 생각의 흔적들이 다시금 생겨날 것이다. 글·사진=김대욱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내부 모습.
내부 모습.
하얀책상 입구 전경.
하얀책상 입구 전경.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