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

◇익숙한 냄새가 나는 곳으로 따라갔다. 풀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그리운 향기가 나는 곳, 타는 저녁 노을이 구수한 냄새를 내뿜는 곳. 충북 영동은 모두의 기억 속에 있는 농촌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외로울 것 같지만 따스함이 느껴져 반갑기만 하다. 따뜻한 봄 날씨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나무와 산이 많아 녹색의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여유는 덤이다. 푸른 풀냄새는 가슴 속 기억을 깨운다. 오래된 추억은 끝 없이 걷게 만든다. 3월 말의 영동은 한 없이 걷고 싶던 곳이었다.

◇오래된 영화 속의 그 장면, 심천역=시간이 멈춘 것 같다. 70년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간판과 건물들이 눈에 띈다. 건물에 쓰인 `옛 추억이 머무는 역`이라는 문구처럼 누구나의 기억 속에 있을 법한 곳이다. 영동군 심천면에 위치한 심천역은 `슬로 라이프`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1905년 1월 1일 문을 연 심천역은 교통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시골 기차역이다. 오래된 역 건물은 세월을 머금었다.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상징적인 장소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알싸한 봄풀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길을 걷다 보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펼쳐진다. 주인 모를 개가 마을을 돌아다닌다. 사람을 봐도 무서워 하지 않고 도도하게 옆을 지나친다. 역 광장의 약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됐나 알 수가 없다. 맞은편 상점 툇마루에 삼삼오오 앉아 있던 중년 여성들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이야기를 나누다 박장대소한다.

대합실로 들어서면 드라마 스튜디오에 발을 들인 것 같다. 익숙한 듯 처음 보는 모습이다. 창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온다. 텅 비었지만 온기가 가득하다. 아무도 없지만 모두가 있는 곳이다. 많은 이들의 추억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벽을 가득 메운 그림은 대합실의 따뜻한 맛을 살려 준다. 모두가 그랬듯 자리에 잠시 앉아 기다림의 여유를 만끽해 본다.

대합실을 빠져 나가면 끝없는 철길이 뻗어있다. 서울로는 하루 3번, 부산으로는 5번 열차가 지나가는 길이다.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시골 역에도 기다림은 있다. 그리고 철길은 기다림을 실어 나른다.

◇악성(樂聖) 박연 선생의 유지를 잇다=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이 있다. 심천면은 국내 3대 악성(樂聖)이라 불리는 난계 박연(朴堧)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그를 기리기 위한 `난계국악박물관`은 2000년 9월 개관했다. 선생이 탄생한지 63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마을은 국악의 명맥을 잇고 있다.

평일 오후였지만 국악 체험을 위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물관 맞은 편 `난계국악체험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다. 건물 옆에 서면 우뚝 세워진 `천고(天鼓)`의 위용에 압도 당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으로 등재 됐을 정도로 거대하다. 다만 겉에 천막을 씌워 외부에서 전체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박물관 내부는 작고 아담하다. 하지만 악기와 악보들이 알차게 전시돼 있어 보는 맛은 충분하다. 100여 점에 달하는 악기들은 친숙하기도, 낯설기도 하다. 악기 소리가 정말 궁금하다면 맞은 편 국악체험관에 방문하면 된다. 1층에 마련된 부스에는 악기 소리를 들려주는 체험 기기가 있다. 성에 차지 않는다면 악기 체험 신청을 하고 실제 악기를 배울 수도 있다.

박물관 뒷편에는 선생을 기리는 사당인 `난계사`가 지어져 있다. 흥겹게 풍악을 울렸을 모습과 달리 가끔 삐걱이는 문 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아무도 찾지 않지만 선생은 가장 높은 곳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풍류객들의 `즐겨찾기` 옥계폭포=풍류객은 산과 물을 좋아한다. 시인 묵객들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수백여 년이 지나도 한결같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난계 선생도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옥계폭포`를 자주 찾았다고 전해진다. 쏟아지는 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심천면 월이산에 있는 옥계폭포는 30m의 높이를 자랑한다. 폭포는 진입로에서 700m 정도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산 밑에 있기에 힘겹게 등산을 할 필요가 없어 좋다. 천천히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 월이산 등산로 초입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등산을 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산세가 험하지 않고 경치가 좋기 때문이다.

멀리서 폭포가 시원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광장에 도착해도 소리의 진원지는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들면 30여m 떨어진 곳에 지어진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정자를 향하다 높은 바위 틈으로 물줄기가 쏟아지는 모습을 발견했다. 옥계폭포다. 폭포에 다가서기 전 앞에 지어진 정자에 올라본다. 시원한 소리와 물이 떨어지는 모습에 눈과 귀가 즐겁다. 폭포 쪽에는 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대리석으로 지어졌지만 주변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위에 올라 물줄기를 감상한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모습에 넋을 놓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다 어느 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습을 담기 위해 부랴부랴 셔터를 누른다.

◇달이 머물다 가는 `월류봉`과 `한천팔경`=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 했던가. 물을 보니 산도 보고 싶었다. 군자는 아니지만 이날 만큼은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마지막 코스로 가장 유명한 자연 관광지를 찾았다. 황간면 원촌리의 `월류봉`이다. 높이 400m의 절벽 산인 월류봉은 `달이 머무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월류봉 주변의 산과 바위들을 가리켜 `한천팔경`이라고 부른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잠시 기거하던 `한천정사`에서 이름을 따왔다. 한천팔경 앞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봉우리 위의 `한천정`이 먼저 눈에 띈다. 정자는 거대한 바위 산인 `화헌악` 끝에 자리잡고 있다. 자못 위태한 모습에 어떻게 지어졌을 지 상상하기 힘들다. 깎아지른 듯한 화헌악은 웅장한 멋이 있다. 팔경 중 가장 튼튼한 모양새다.

한천정 뒤에 우뚝 솟은 월령봉은 한천팔경의 자랑이다. 능선은 거칠지만 곡선의 미가 살아있다. 옆 산까지 이어지며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월류봉 일대를 휘감는 `초강천`의 흐름은 힘차다. 진한 녹색의 물줄기는 쉴 새 없이 하류로 진격한다. 화헌악을 끼고 돈 물은 모래밭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잔잔하게 흐르지만 기운이 넘친다.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멈춰 산을 바라봤다. 물은 우암 선생이 바라봤을 때처럼 같은 모습으로 말 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하게 휘몰아치던 물이 모래톱에서 잠시 멈추는 것 처럼, 팽팽하던 신발 끈을 잠시 푸는 것처럼, 때론 삶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곳으로, 익숙한 냄새가 나는 곳으로 따라가자. 전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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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역 주변은 70년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간판과 건물들이 눈에
띈다. 사진은 역 광장에 있는 약방.
심천역 주변은 70년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간판과 건물들이 눈에 띈다. 사진은 역 광장에 있는 약방.
심천면 월이산에 있는 옥계폭포는 30m의 높이를 자랑한다. 폭포는 진입로에서 700m 정도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심천면 월이산에 있는 옥계폭포는 30m의 높이를 자랑한다. 폭포는 진입로에서 700m 정도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전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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