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귀부인들은 분을 곱게 바르고 버들 같은 모양으로 이마의 절반 정도만 눈썹을 그렸다. 당시 이러한 형태의 눈썹과 새하얀 피부를 지닌 여성이 미인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자연환경에서 얻은 재료로 화장품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녹두·팥·콩을 맷돌에 갈아 만든 `조주`가 비누가루 역할을 했고, 물기가 많은 열매인 수세미와 오이 즙을 내어 화장수(化粧水)로 썼다. 살구씨나 아주까리씨, 쌀겨에서 짜낸 기름은 연지나 눈썹용 먹을 갤 때 쓰는 용해유(溶解油)로 사용하거나 향수에 해당하는 향유(香油) 또는 머릿기름(髮油)으로 사용됐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외모를 가꾸는 것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적지 않았다. 화장과 치장을 하는 등 외모를 가꾸는 것이 부덕(不德)하다 하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분을 바르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으니 궁중여인들과 기생이었다. 이들은 항상 분과 연지를 바르는 화장을 하였는데, 많은 여성들이 이를 본떠 스스로를 꾸미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넷째 딸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82~1844)는 생전에 아껴 사용했을 분첩(粉貼)과 연지첩, 연지도장 등의 생활용품 33점(중요민속문화재 제212호)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분첩은 풀솜(雪綿子)으로 동그랗게 뭉친 후 누에고치로 겉을 싸서 만들었다. 쌀·서숙·분꽃씨 등으로 만든 미분(米粉)과 납성분이 포함되어 백분에 비해 점성이 뛰어난 연분(鉛粉)을 분첩에 담아 사용하였다. 대개 주사(朱砂)와 홍화(紅花)로 만든 색조 화장품인 연지를 새끼손가락으로 볼에 찍어 쓰곤 하는데, 덕온공주는 연지첩과 연지도장을 사용했다.

덕온공주의 유물 외에는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8폭 병풍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를 통해 저마다 몸단장에 정성을 들이는 여성들의 모습과 각종 화장도구들 정도를 살필 수 있는 정도이다. 이처럼 인물화를 비롯한 회화류와 벽화, 각종 사료를 통해 당시 유행했던 화장의 유형과 재료, 화장도구를 살필 수 있지만 실물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궁중의 화장문화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은 여건 속에서 덕온공주의 화장 관련 유물은 공주의 생활상과 당시의 미적 관념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23세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한 덕온공주는 아마도 외면적 아름다움과 내면적 아름다움을 두루 추구했을 것이다. 이 유물은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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