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금산

칠백의총
칠백의총
`별과도 속삭이네 눈웃음치네/부풀은 열아홉살 순정 아가씨/향긋한 인삼 내음 바람에 싣고/어느 고을 도령에게 시집가려나`(김하정의 노래 금산아가씨中)

오래된 노랫말처럼 물 많고 산 많은 곳. 산이 많아 별과 가까운 곳. 이름 없는 의병들이 잠들어 있는 곳. 향긋한 인삼 내음이 퍼져 나오는 곳. 금산(錦山)은 이름 그대로 비단같은 산이 줄지어 있는 곳이다. 지역의 70%가 산이라서 지대가 높다. 충남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100m라면 금산은 250m에 위치해 있다. 덕분에 공기가 차다. 공기가 찬 덕분인지 별도 잘 보이고 인삼도 잘 큰다. 천혜의 자연 환경이 준 선물이다.

아직 찬 공기가 가시지 않은 2월의 금산은 사람들과 명소가 주는 따뜻한 기운이 곳곳에 퍼져있다.

◇아직도 빛나는 천년사찰 보석사=사찰 대부분은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는다. 종일 찬 바람이 휘몰아쳐도 사찰 안은 따뜻한 기운이 넘실댄다. `천년 사찰`이라는 별명처럼 보석사는 1000년의 명맥을 잇고 있다. 서기 886년인 헌강왕 12년, 조구대사가 창건한 보석사는 이름 그대로 `보석` 덕분에 이름을 갖게 됐다. 절터 앞 금맥에서 캔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모신 것이 시초라는 설 덕분이다. 일제시대 불교 31본산 중 하나였던 보석사는 33개의 사찰을 거느렸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작고 아담한 규모의 사찰이다. 지금은 조계종 제 6교구 마곡사의 말사(末寺)다. 마곡사처럼 큰 절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흔적이 고풍스런 향으로 피어난다.

입구를 들어가면 1840년도에 세워진 `의병승장비`가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승장으로 전장에 나서 순절한 영규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사적비다. 건립 100여년이 지난 1940년, 일본 순사가 비각을 헐고 훼손해 묻어 놨던 것을 광복 후 다시 세웠다. 대웅전 왼쪽 옆에 있는 `의선각`도 영규대사를 기리기 위한 건물이다. 계룡산과 갑사, 보석사를 오가며 수도생활을 하던 대사가 기거하던 곳이다.

대웅전을 끼고 돌아 봉황문으로 나가면 거대한 은행나무의 위용에 입이 벌어진다. 높이 48m, 폭 10미터 정도의 은행나무는 장정 6명이 둘러싸야 할 정도로 굵고 높다. 천연기념물 365호인 `보석사 은행나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알려진 보석사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나면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실제 1945년 광복 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많은 이들이 나무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나무를 마을을 지키는 신령으로 여기고 각별히 모시고 있다.

◇풍류객들의 놀이터 적벽강=금산을 가로지르는 금강은 지역민들의 젖줄이다. 금강 상류 지역인 금산은 산과 산 사이로 금강이 흐른다. 그 산 사이를 지나며 금강이라는 이름이 잠시 바뀔 때도 있다. 부리면 수통리의 기암절벽 앞이다. 유유히 흐르던 금강은 그 앞에서 `적벽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곳의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을 `적벽`이라고 부른다. 바위산이 붉은 색이란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중국 양쯔강 상류의 적벽강과 비슷한 모습이라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약 30m 높이인 적벽 아래에는 강물이 호수처럼 잔잔하게 흐른다. 강 옆에는 모래톱이 바닷가처럼 펼쳐져 있다. 모래 사장을 잠시 걷다 보면 차가운 공기를 타고 춤추는 갈대밭이 사람들을 반긴다. 수심은 얕지만 다소 위험한 구간도 있다. 함부로 물놀이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마을 사람들은 옛부터 적벽을 `칼바위`라고 불렀다. 칼로 깎은 듯한 절벽이 독특한 풍광을 만들어서다. 적벽강은 그 풍류를 즐기러 예전부터 시인 묵객들이 자주 방문하던 곳이다. 나룻배를 타고 놀던 풍류객들은 석양이 질 때마다 시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칠백의총에 이름 없는 영혼들이 잠들다=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때 치열하게 싸운 영혼들이 잠든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고바야카와 다카야케 장군은 1만 5000명의 왜군을 이끌고 금산 길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왜군은 평양성까지 점령했지만 군량미가 부족했다. 물자를 확보하려던 왜군은 풍족한 전라도에 눈독을 들인다. 당시 금산은 700여 명의 의병과 승병이 지키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의병들 덕분에 결국 왜군은 전라도로 넘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경상도로 퇴각한다.

칠백의총에 들어가면 먼저 장군들의 위패와 의병들을 모셔 놓은 `종용사`에서 참배를 해야 한다. 입구에서 들어가 400m정도 걸어 들어가면 종용사를 찾을 수 있다. 안에는 이름 없는 의병들과 고경명 장군 등 21명의 위패를 모셔놨다. 종용사 뒷편에는 스러져간 영혼들을 위한 커다란 무덤이 있다. 큰 모습 덕분에 관광객들이 무덤 앞에서 잠시 멈춰 사진을 찍거나 하염없이 바라본다.

당시 조선왕조실록 판본은 총 5곳에 보관돼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보관되던 실록은 전부 소실됐지만, 오직 전주 판본만 남았다. 권율 장군이 이끌던 의병들이 금산에서 치열하게 싸워 지켜낸 자산이다. 권율장군의 사위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이다. 이항복의 `백사` 6권을 보면 권 장군이 기억하는 금산 전투가 생생하게 기록돼있다. 권 장군은 `나는 행주대첩보다 금산의 이치대첩이 기억에 훨씬 남는다`고 말할 정도로 금산 전투를 인상깊게 생각했다.

금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산이 많은 지형 덕분이다. 매년 육군사관생도들은 여름방학마다 금산 지역을 방문해 지형과 전략을 탐구한다. 독특한 지형이 큰 영감을 주기 때문이란다. 임진왜란 당시에 권율 장군 등의 신묘한 전략도 지형을 잘 활용했기에 가능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매복과 목진지 점령 등을 통해 일본군을 하나 둘씩 처리했다. 아군 피해는 당연히 적었다.

길태수 금산군 관광해설사는 "칠백의총은 봉급을 받고 살던 관군들과 달리 자체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곳"이라며 "칠백의총은 금산의 자랑이자 역사적으로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고개 숙여서 묵념을 해야 할 곳이다"라고 말했다. 전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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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사 전경
보석사 전경
적벽강은 강 앞에 자리한 기암 괴석이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다.  전희진 기자
적벽강은 강 앞에 자리한 기암 괴석이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다. 전희진 기자

전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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