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사건사고

2015년은 60년만에 돌아온 을미(乙未)년이다. 특히 청(靑)양의 해라고 해서 온순한 양의 기운과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푸른색의 기운이 만나 개인이나 국가에 행운이 가득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을미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을미년에는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역사속 을미년의 사건사고를 들여다봤다.

을미년의 가장 큰 사건으로는 을미사변을 꼽는다. 1895년에 발생한 을미사변은 일본 낭인들의 손에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된 사건이다. 당시엔 러시아와 일본 등이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시기였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친분을 쌓아 견제를 해왔다. 이 때문에 일본의 조선침략의 가장 큰 걸림돌로 명성황후가 지목됐던 것. 조선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와 일본인 자객들은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살해했다. 일본의 범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에 태워 없애버리는 극악무도함을 보였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조선의 친일파들이 국정을 장악했고 이후 을미개혁이 추진됐다. 을미개혁은 제3차 갑오개혁이라고도 불린다. 이 때부터 태양력을 사용하게 했으며 종두법과 단발령을 시행했다. 또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접한 유생들은 황후의 폐위에 반대하고 친일 내각을 타도하는 의병 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서울과 제천, 충북 보은 등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관아를 습격하고 무장을 갖춰 전쟁에 돌입했다. 이것이 첫번째 항일저항운동인 을미의병이다.

근현대사에서도 을미년은 역사적인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 사고가 이어졌다.

1955년 5월 25일 친북계 재일 교포단체인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결성되면서 일본 교포사회에는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거류민단으로 양분되게 됐다. 조총련은 북송사업은 물론 북한의 체제 홍보 등 북한의 해외 공작기지로서의 각종 활동을 벌였다.

이보다 앞선 3월 2일에는 부산역에서 서울로 출발할 예정이던 열차에서 폭발사고가 발생, 42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중상을 입는 큰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출발 20여 분을 앞두고 발생한 폭발사고는 승객이 객차에 실어 논 휘발성 액체 때문이었다. 휘발성 액체를 담은 통에서 액체가 흘러나왔고 판매원이 바닥에 흘린 액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촛불을 켜 폭발로 이어졌던 것. 이 사고로 1개의 객차가 완전 소실됐으며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로 기록돼 있다.

1955년만 해도 가부장적인 사회분위기와 여성에 대한 정조 관념이 높은 시대였다. 하지만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구문명과 여성의 정조관념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로 1년간 70여명의 여성들을 농락한 박인수는 미군에서 근무하며 춤을 배웠고 당시 이런 서구문화에 관심을 갖는 젊은 여성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당시 사건이 더욱 파장이 컸던 이유는 피해 여성들 대부분이 대학생이었으며 국회의원 등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여성들이 상당수 포함됐기 때문이다.

당시 1심 재판부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판결문 내용을 밝혀 현재까지도 희대의 판결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은 자유로워진 성풍속도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윤리적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또 미군이 주둔하면서 인기가 높아진 춤과 댄스홀 등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이밖에 야당의 뿌리인 민주당이 1955년 창당됐으며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가입한 해이다. 또 근현대사의 대표적 과학자인 아인슈타인과 잘생겼지만 반항적인 연기를 통해 전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흔든 배우 제임스 딘이 사망하기도 했다.

역사속 을미년은 시대의 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유독 많았다. 2015년 청양의 해에는 우리나라 국운에 도움이 되는 사건이 많이 발생되길 소망해 본다. 인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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