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배 논설위원
나병배 논설위원
지난 10월경 정치권 키워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었다. 한 여론조사 기관이 발표한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여기서 불씨를 얻은 정치권이 반 총장 마케팅 경쟁을 벌였고 역설적으로 뒷수습에 나선 건 반 총장 쪽이었다. 이후 잔불이 사라지는가 싶었지만 반 총장의 경우 또다시 `행복한` 구설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연말연시엔 기획 여론조사물이 쏟아진다. 정치 성수기 효과다. 그중 열독률이 담보되는 분야는 단연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다. 이때 반 총장 이름을 뺀다면 모를까 굳이 그래야 할 현존하는 이유가 없다면 설문항목에 집어넣는다고 봐야 한다. 여론조사기관 입장에서도 그를 포함시키는 게 남는 장사다.

반 총장은 장외에 머물고 있는 처지다. 그런데 대선 게임에 참여한다고 가정했을 때 현재 가장 승률이 높은 편이다. 이는 여론조사 흥행 문제와도 맞물린다. 그의 이름을 배제함으로써 여론조사 상품의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는 리스크를 말한다.

차기 대선지형이라는 렌더링 이미지로 볼 때 반 총장은 상수 지위에 있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어제 발표된 또 다른 여론조사 기관의 신년기획 차기 대통령 적합도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번엔 지지율을 물었고 이번엔 적합도라는 표현으로 물었지만 응답률에 별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누굴 지지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이나 누가 적합한가라고 돌려 질문하는 것이나 응답자가 해석하는 말뜻은 다르지 않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반 총장 지지율(적합도)은 견고함을 증명했다. 지난번 39%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성인 10명 중 4명이 특정인을 차기 대통령감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시사점이 많다. 일단 이 수치는 편의상 비교하면 현직 대통령 국정지지율과 호각세를 이룬다 할 것이다. 반 총장은 국제기구 수장직을 수행 중인 국외인사다. 그런 인물이 차기 적합도이긴 하지만 현재권력과 대등한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면 누가 뭐라 해도 차기 대선구도를 뒤흔들 수 있는 다크호스로서 손색이 없다.

이어, 이번 여론조사에 나타난 반 총장에 대한 여론 지지율 분포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연령, 성별, 정치성향, 지역을 막론하고 치우침이나 쏠림 현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잠재적인 대선주자로서 취약 지점이 없다는 사실은 더 없는 강점인 동시에 `유사시` 표의 확장성과 연동될 수 있음을 뜻한다. 수험생이 수능시험을 칠 때 교과목 영역별로 고른 득점력을 유지하는 것에 비유된다.

이는 여야 경쟁자들을 실효적으로 압도하는 자산이기도 하다. 반 총장 지지율이 나머지 주자들 수치를 합친 것보다 높다는 점도 유의미하지만 반대로 그들 입장에선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적지 않다. 첫째 반 총장과 초장부터 지지율 격차가 꽤 벌어진 상태로 고착화될 수 있다는 점, 둘째 지지율 요소 면에서 편차가 크다는 점, 셋째 그들 서로 간에 지지율을 다투고 있다는 점, 넷째 제도 정치권에 기속돼 있어 개별적 반등 모멘텀을 포착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점 측면에서 매우 불리한 현실로 여겨질 수 있다.

반 총장의 고공 지지율은 지난 대선을 앞둔 시기 안철수 의원의 궤적을 연상케 한다.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어쩌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 총장은 기업이 야심차게 준비한 기획상품이 아니다. 전문관료로서 투신해 마침내 현직에 올랐고 자연스럽게 시대정신을 찾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그를 차기감으로 주목했다고 보면 된다. 안 의원도 대중에 노출될 당시 초반 지지율은 높았지만 결과적으로 스텝이 엉켜 본선 게임에서 배제된 바 있다.

반 총장은 특히 `기울어진 운동장`의 낮은 편에 입지해 있다 할 수 있다. 정치적 설계와는 무관한데도 구도와 지형이 그렇게 돼 버렸다. 차기 대선에 나오든 안 나오든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차기를 도모하기만 하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여러 개 생성될 수 있다. 차기 대선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사람이 반 총장이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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