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정치란 혐오스런 단어다. 그러한 혐오는 정치인에 대한 절대적 불신으로 나타난다. 2014년 세계경제포럼의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 우리나라는 총 144개국 중 26위인 반면, 정치인의 공공신뢰는 97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10월 KBS 여론조사에서는 국회의 신뢰도가 10점 만점에 2.24점으로 국가기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부정적 이미지로 조건화된 '정치'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정치학에서 회자되는 정치의 뜻은 '사회를 위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다. 언뜻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그 이상 멋진 정의는 없다. 민주사회에는 수많은 가치들이 경쟁하면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조정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낙태 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여성의 행복추구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충돌한다면,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대의민주사회에서는 가치의 우선순위를 배분할 권한을 공식선거를 통해 대표에게 위임한다. 대표의 결정사항은 정당한 권위(authority)가 부여되고 시민들에게 구속력을 가진다. 대표들이 낙태금지법을 채택하면 태아 생명권은 존중되고 여성 행복추구권은 유보된다. 낙태 찬성론자조차도 민주주의 룰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의 낙태 금지 결정에 순응해야 한다.

정치는 사회적 가치 배분과 조율이 요구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필요하다. 우리가 정치를 혐오하는 이유는 권한을 위임받은 자들이 가치배분 과정에서 보여주는 행태가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숙의(熟議)와 협상 및 타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고성과 삿대질, 물리적 충돌과 날치기 통과는 익숙한 모습이다. 갈등 조정은 고사하고 자신들만의 게임에 몰두하면서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사회갈등을 조장한다. 이러한 모습은 중앙과 지방을 가리지 않는다.

최근 대전시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도시철도 2호선 논란도 가치배분과 관련된다. 자기부상열차와 맞물린 고가방식은 신속성, 안정성 등에서 유리한 반면, 노면(트램)방식은 비용 절감, 교통약자 보호와 접근성 등에서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방식에 따라 자가운전자 편의성과 대중교통 활성화 측면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한다. 건설비용과 운영적자를 부담할 현 세대와 다음 세대의 형평성 문제도 가치판단을 요구한다.

도시철도 사태의 전개 과정은 지방정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 기관분리형 지방자치를 택하고 있다. 하지만 지나친 권한의 편중으로 자치단체장에 의해 가치배분이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선 5기 도시철도 건설방식을 두고 집행부의 일방적 추진에 제동을 건 것은 시민사회단체였고, 민관정위원회라는 제도적 해결책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고가방식 편향의 위원회 운영에 시민사회단체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합의는 고사하고 장외 공청회 경쟁과 집단양극화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대덕구 소외론' 같은 정치적 쟁점과 맞물리며 갈등이 증폭된다. 지방선거 변수까지 가세하면서 전임 시장의 결정이 백지화되었다. 최근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타운홀 미팅을 통한 의견수렴까지 마쳤지만 미숙한 운영으로 논란만 키웠다는 평가다. 이 과정에서 수수방관하던 대전시의원들은 최근에야 간담회 형식을 통해 2호선 건설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다수의견을 내놓았다.

도시철도 2호선 사태는 제대로 된 대의정치 실종이 지역사회에 얼마나 큰 비용을 치르게 하는지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게 한다. 몇 년 전 프랑스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을 방문했을 때 동네 주민의 답변이 떠오른다. "지방의원들이 선택했기 때문에 걱정 없이 따랐다"는 것이다. 한 통계자료는 생전 처음 본 낯선 시민보다도 대전시의회가 신뢰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의 백년대계를 위해 집행부가 아닌 대전시의회의 초당적 입장 정리와 적극적 개입을 통한 타결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본다. 사회적 가치의 조정 역할은 대의민주사회에서 선거를 통해 정통성을 부여받는 유일한 합의체로서 대전시의회가 갖는 사명이자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곽현근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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