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과·성적 위주 사회 분위기 좌뇌적 사고·행동 중시 문화 직감·감정의 우뇌적 사고가 평화·나눔의 가치관 심어줘 "

미래학자이기도 한 다니엘 핑크의 최근 저서 가운데 '새로운 미래가 온다'라는 책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뇌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뇌는 직감, 감정과 관계되며, 시적이며 감각적인 면과 연결되어 있다. 이에 비해 좌뇌는 언어, 논리와 관계하며, 추상적이며 관념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좌뇌를 중시하는 문화다. 좌뇌 문화의 특징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하며, 모든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가운데 완벽함을 추구한다. 반면에 우뇌 문화는 통제 대신에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다. 우뇌적 사고는 꼭 맞는 결론이 없는 채로 마무리하는 여유를 허용한다. 우뇌 문화는 때로 혼란스러워 보이고 측량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뇌 문화는 여성적이고 신비적이며 상상적인 측면을 개발하여 준다. 우리는 좌뇌 문화가 지배하는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우뇌 문화를 조화롭게 접목시켜 갈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와 그의 동생 마리아가 대비되어 있다. 마르다가 그의 집을 방문한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마르다이다. 마르다는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보통 한 집단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며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사람은 열 명 중에 두 명 정도라고 한다. 마르다가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 마르다는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고 있다. 마르다가 분주했던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준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마르다 증후군'이라고 한다. 마음의 분주함이 본말을 전도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원래 계획했던 핵심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일 자체가 더 중요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상황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마음이 분주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때때로 우리를 좌절로 몰아간다. 그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인지 모른다.

놀랍게도 우리는 마르다보다는 마리아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고 하는 평가를 접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이 특정한 사건을 통해서 마리아의 선택을 칭찬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 '승천할 기약이 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9:51) 갈릴리 땅을 떠나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무더운 사마리아 광야를 지나오셨다(눅9:52-56).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적인 광야를 경험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러한 심정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기 위해 들른 곳이 평소에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마르다의 집이었다. 예수님은 지금 지쳐 있었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곳을 찾고 계셨다.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고 이해해주고 들어줄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슬퍼하는 눈을 보지 못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해 드리고 난 후 나중에 부엌에서 나올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에게는 배고픔이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양식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마음의 평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으며, 그 평화는 사랑의 나눔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서로의 필요를 알아차리는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 사회는 좌뇌적 사고와 행동이 지배하고 있다. 그 결과 성과 위주, 성적 위주, 성공 위주의 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흐름에서 뒤처지고 힘들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지도 않고, 알아도 무시하며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성공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심지어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상처와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상대방의 진정한 필요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것이 우뇌적 사고에서 비롯되는 사랑의 영성일 것이다. 이달 한남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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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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