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티(Haiti)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다. 1942년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을 발견한 이래 섬의 원주민들은 학살과 질병으로 몰살당했고, 그 빈자리는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 노예들이 채우게 되었다. 스페인이 차지했던 아이티는 이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프랑스혁명과 프랑스 인권 선언에 고무된 아이티의 흑인 노예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해 1804년 1월에는 결국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아이티는 신대륙에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한 나라이며,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미 국가이다.)

1801년 아이티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은 약 1만 2000여 명을 시작으로 많은 군인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전투 중 프랑스 군대에 전염병이 돌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1802년 6월까지 프랑스군은 3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하루에 30-50명씩 사망자가 발생했다. 1803년 11월 아이티를 철수할 때까지 파견되었던 3만 3000여 명의 프랑스 군인 중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3000여 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전염병은 아이티에게는 독립을,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는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군을 포함하여 신대륙으로 이주했던 백인들을 괴롭혔던 병은 '황열병(yellow fever)'이다. 모기가 옮기는 바이러스(virus)가 원인인 황열병은 간(肝)을 침범하여 얼굴과 눈동자가 노래지는 황달을 일으키고 열도 나게 하여 황열병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고열, 황달, 구토, 설사, 요통, 심한 피로감 등이 특징인 황열병은 한 번 걸린 후 회복되면 다시는 걸리지 않는 면역을 가지게 된다.

사람들이 황열병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카리브해 지역에서 황열병이 유행하기 시작한 뒤이지만, 실제로 황열병이 넓게 퍼져 있던 지역은 서부아프리카 지역이었다. 일찌감치 아프리카의 풍토병이었던 황열병은 백인들이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수입하던 무역선을 타고 신대륙으로 전파되었다. 상대적으로 저항성이 약했던 백인들은 황열병에 속수무책이었고, 황열병은 빠르게 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져 나가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 유럽으로까지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은 스페인의 항구 도시 '말라가'였으며,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 황열병에 감염되었다.

1880년대가 되어서야 프랑스의 파스퇴르가 전염병의 원인이 미생물이라는 학설을 제시했다.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보다 뒤늦게 제국주의 침략에 눈을 돌린 미국은 남미 진출과 파나마운하 점령을 위해서 황열병을 비롯한 열대성 풍토병을 극복해야만 했다. 미국 정부는 군의관들을 주축으로 황열을 비롯한 많은 연구를 진행했고, 결국 모기가 황열을 전파시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황열병 예방 백신을 이용한 예방법도 알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남미에서의 주도권을 쥐는 데 아주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우수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제국주의 시대에 변변찮은 힘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아이티. 아이티의 입장에서 보면 황열병은 강력한 우군이었다. 그러나 영토와 영향력 확장을 꿈꾸던 미국이 황열병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게 됨에 따라, 파나마운하 건설을 필두로 한 남미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펼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발달된 과학기술이 가지는 어두운 한 단면 또한 여실히 보여준다.

대체로 역사의 물줄기는 의외의 자리에서 복병을 만나 다른 굽이를 만들어 왔고, 그 굽이굽이에 전염병들이 있었다.

유승민 을지대 의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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