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120주년-충청의 현장을 가다 ① 역사적 의의와 주요 유적지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마련된 기념탑.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마련된 기념탑.
◇ 시리즈를 시작하며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이었다. 그로부터 120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갑오년`을 맞이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을 기반으로 한 동학은 당시 제국주의의 열강과 봉건체제의 폭정 아래 신음 하던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리로 다가왔다.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한 동학은 신앙대상에 대한 믿음보다는 주체적인 자각과 실천을 강조했다. 대전일보사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충청지역 주요 유적지를 돌아보고 동학의 현재적 의미를 재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 `충청지역 동학의 발자취를 찾아서` 연재한다. 모두 4회에 걸쳐 보은, 옥천, 공주 등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전적지와 기념시설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흐름을 되돌아 보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에서 시작돼 1895년 1월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적으로 이어진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후기 빈번했던 민란의 연장선 위에서 종래의 민란을 집약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조직적 배경에는 조선 후기 이래 `밑으로부터` 표출되고 있던 민중들의 변혁의지를 수용해 체계화한 동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동학의 `포접(包接)` 조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피지배 계층의 사상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던 동학사상과 전국적 조직이던 동학교단을 매개로 광범위한 농민 대중이 참여했고 개화파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운동, 재야유생이 주도했던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 항쟁 등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나, 동학농민운동은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종래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항쟁을 전국 차원의 항쟁으로, 일시적 투쟁에서 장기 지속적인 항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조선 후기 빈발 했던 농민봉기 단계에서 나타났던 민중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이었다. 또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및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 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됐다.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흐름

1894년 1년간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됐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은 크게 여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교단과 일반 민중들이 전개한 교조신원운동단계, 둘째는 1893년 11월의 사발통문 모의에서 비롯된 1894년 1월 고부농민 봉기, 셋째는 1894년 3월 21일 전라도 무장에서 일어난 제1차 동학농민혁명, 넷째는 5월 7일 전주화약을 계기로 이뤄진 집강소 통치기, 다섯째는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침입 사건을 계기로 봉기한 제2차 동학농민혁명, 마지막 여섯째는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걸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한 후 이뤄진 농민군 진압 및 학살이 그것이다.

이 여섯 단계 중 충청지역은 첫 번째 단계와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대체로 북접 계통의 영향 아래 있던 충청지역은 공주 우금치 전투로 대표되는 제2차 동학농민운동의 주요 전장이었다. 물론 그 전에 교조신원운동 단계인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의 집회 때 아산, 홍주 등지에서 동학농민군들의 술렁임이 있어서 수령들이 서울로 피해가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명지전문대학교 채길순 교수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영남·영동 지방에 이어 소백산맥에 의지해 단양, 괴산 지역을 시작으로 동학 포교를 시작했다"며 "이후 동학은 충북 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돼 나갔고 동시에 서울 경기와 충청 내포 지역으로 뻗어나가게 됐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후 1894년 제2차 동학농민혁명 시기 당시 9월에 최시형을 중심으로 북접의 무력봉기 선언이 있은 다음부터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전장은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격전지였던 우금치를 중심으로 한 공주 일대였지만, 공주 서북쪽으로 예산, 덕산, 유구를 비롯해 서산, 태안, 해미 등 내포지방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줄기차게 전개됐으며, 남쪽으로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서천, 한산 지역에서도 이미 1차 동학농민혁명 시기부터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시작됐다.

9월 중순 삼례에서 일어난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북상해 여산, 은진을 거쳐 강경에 도착한 것은 10월 초순이었으며, 10월 9일에는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주력부대와 합류했다. 한편 북접계통의 다른 한 부대는 청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를 향해 남하, 10월 23일에는 공주 동북쪽에 있는 대교(장기면)까지 진출해 논산을 거쳐 북상하는 호남의 동학농민군과 호응하였다.

동학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은 10월 23일 이인전투에서 시작돼 24일 대교전투, 25일 효포, 능치전두, 그리고 최후의 항전인 11월 9일의 우금치 전투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의 성패가 달린 공주 공방전에서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맞서는 관군과 일본군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끝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2차 기병으로 모아진 거대한 동학농민군의 힘이 공주성을 에워싸고 폭발하였으나, 수없이 많은 동학농민군을 공주전선에 묻어버린 채 호남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 후 남쪽으로 퇴각한 동학농민군들이 다시 힘을 모아 원평과 태인 등지에서 반격전을 폈으나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충남 남부와 내포지역의 동학농민군 역시 공주를 향한 진출을 끈질기게 시도했으나 11월부터 본격화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점차 사그라졌다.

충청에서 활약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천안 목천의 김용휘, 김성지, 김화성 등 이른바 `삼로(三老)`로 불리던 세 동학지도자들이 1894년 10월 8일부터 3일간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며 예산지역은 박희인, 박인호, 홍종식 등이 이끈 동학농민군이 예산, 홍성 등지에서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충주와 청풍의 경우는 성두환이, 청주는 임규호, 권병덕이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충청지역은 전라도 중심의 동학농민혁명 연구 분위기에 밀려 아직 상세하게 해명되지 못한 지역이 대부분이어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충청지역 주요 유적지

동학과 관련된 충청지역 대표 유적지는 공주 `우금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을 비롯해 동학의 전파과정에 있어 충청지역에는 특별히 주목해야 할 몇몇 유적지들이 존재하고 있다.

공주 송장배미는 충남 공주시 금학동에 위치해 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은 우금치를 공격하는 한편 봉황산의 하고개를 넘어 감영의 배후를 치고자 했다. 그러나 하고개는 천혜의 요새로 계곡을 가득 메운 농민군의 시체만 남긴 채 후퇴해야 했다. 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매장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송장배미라는 논이다.

천안 세성산 전투지는 충북 천안시 성남면 상동리이다. 세성산 전투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공주전투의 전초전이었다. 천안, 전의,목천 등에서 기포한 동학교단 측 농민군은 그곳의 농민군지도자 김복용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세성산을 근거지로 해 남하해 오는 관군과 일본군을 격퇴한 후 공주로 진격해 오는 농민군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894년 10월 21일 장위영과 이두황이 이끌고 온 관군과 이를 지원한 일본군의 공격에 3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함으로써 공주일대에 집결한 농민군의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보은 취회는 동학 역사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조신원을 위한 광화문복합상소 직후 동학교단은 1893년 3월 11일 대도소가 있는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에서 교조신원과 함께 척왜양창의 기치 아래 다시 집회를 가졌다. 전라, 경상, 충청, 경기, 강원 등지에서 모인 수 만명의 동학교도가 집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산 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대오를 정비하며 `척왜양창의` 라고 쓴 깃발을 내거는 등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조정에서는 1893년 3월 25일 충청감사 조병식을 파직하고 집회군중을 해산시킬 선무사로 어윤중을 보내는 한편, 충청병사 홍재희에게 군사 300을 이끌고 보은으로 가게 하였다. 이 같은 압박 속에서 동학교도는 어윤중의 해산 회유과 군대의 압력에 굴복하고 스스로 해산하고 말았다. 최신웅 기자

도움말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충북학연구소·공주시·보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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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에 위치한 동학혁명군위령탑 사진=대전일보 DB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에 위치한 동학혁명군위령탑 사진=대전일보 DB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에 조성된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사진=대전일보 DB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에 조성된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사진=대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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