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 존 에버라드 지음·이재만 옮김 책과함께·364쪽·1만8000원

핵 보유국, 테러 국가, 가난한 나라, 3대 세습….

이제까지 세계의 눈에 비친 북한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고 북한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서적들에는 그런 시선이 고스란히 담기곤 했다. 그런 면에서 영국인의 북한 체류기를 바탕으로 탄생한 '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은 이제까지의 북한 관련 서적과 확연히 구분된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외교관 존 에버라드가 2006년 2월 평양 대사관에 발령 받아 2008년 7월 그 곳을 떠나기까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았다.

저자인 존 에버라드는 보통의 외국인들과 다른 마음으로 북한에 다가갔다. 북한의 자연환경에 반한 저자는 색안경을 쓰고 대사관 안에 앉아만 있는 대신 자전거를 타고 틈 날때마다 평양 곳곳을 누비며 오염되지 않은 평양의 자연과, 사람들을 만났다.

저자는 가난과 폭력으로 귀결되는 북한을 향한 시선에 반기를 든다. 그는 많은 논평가나 매체들이 전하는 개인 숭배나 핵 실험등의 부정적인 모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모든 측면 이상으로 북한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제 국가이며, 그들의 삶은 이 나라의 핵 정책이나 다른 어떤 중대한 국제적 쟁점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동료, 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나 삶을 구성하는 일상의 온갖 관심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가 직접 겪어본 북한 사람들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개인들이며 대부분 호의적이고 친절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책을 읽기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저자가 '외국인' 이라는 점, 둘째는 그가 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한 사람들이 북한의 '엘리트 비핵심층'이라는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북한을 대하는 태도나, 그곳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한국인인 우리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로인해 깊이는 다소 떨어질 지언정 객관성 만큼은 더 확실하다.

또한 '엘리트 비핵심층'을 중심으로 기술한 점도 북한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만드는데 한몫 한다. 저자가 말하는 엘리트 비핵심층이란, 초호화 생활을 누리는 엘리트 핵심층도, 북한 주민의 절대다수인 농민도 아닌 그룹이다. 그들은 보수가 많지는 않지만 주, 식이 보장되는 나름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다. 먹고 사는 모든 문제가 풍족하지는 않지만 배고플 일도 없으며 대다수 평양에 살면서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을 한다. 즉, 약간의 특권을 누리며 사는 소수 집단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북한 주민의 실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기존의 북한 빈곤층 삶에만 치우친 인식들을 보완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책은 저자가 목격한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1부, 외국인의 북한 생활을 들려주는 2부, 북한 정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3부 그리고 북한을 대하는 공동체의 태도를 다룬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북한에서의 생활을 다룬 부분이다. 저자는 "사람들은 평양 생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리라고 상상한다"며 "분명 문제로 가득한 생활이지만, 우리 외국인들은 모두 그적저럭 지낸 듯 하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서구인들이 평양에 있는 직원들의 복지를 걱정하는 것 처럼 북한 사람들은 '악의 온상'이라고 여기는 미국 생활을 걱정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워싱턴으로 출장을 떠나기 전 북한 직원들이 "부디 무사히 다녀오라"고 근심 섞인 목소리로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미국에서 만큼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자전거로 평양을 누볐고 평양 외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때때로 그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어 일반인 진입 금지 지역에 들어서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에도 그를 잡아 세운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커피를 타주거나 말을 거는 등 친절한 모습으로 배려해주었다고 한다. 한번은 자전거를 타고 이곳 저곳을 카메라에 담던 중 군인이 다가와 사진을 검사한 적이 있었는데 북한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사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사진기를 돌려주며 "좋은 것만 부탁합니다!"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책의 원제가 'Only Beautiful, Please'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서구에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마음이 그들이라고 다르지 않은 것이다.

북한의 가족관계에 대해 전할 때는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이 서구인의 눈에 한국의 '가족관계'란 매우 복잡하고 엄한 것으로 보이는 듯 하다. '더욱이 평양에 사는 일가는 시골의 친척이 방문하면 당연히 보살펴야 한다고 여겼고… 부모들은 치마 길이와 음악 취향, 공부의 필요성에 관해 고지식한 잔소리를 늘어 놓거나 결혼한 자식과 그 배우자에게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유교적 권위를 행사하는 듯 했다.'(36쪽)

이런 문화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영국인보다 설명 속 가족관계가 더 친숙한 것을 보면 새삼 북한과 우리가 온전히 '남'이 아니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하지만 괴리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시부모에게 맨 먼저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남편은 시부모가 도착하지 않으면 며칠 동안 아이를 못보기도 한다든지, 정부기관 건물에 간판을 달지 않아 그 앞을 수시로 지나 다니는 시민들 조차 그 건물이 단순한 '회색건물'외에 어떤 곳을 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는 것, 기차가 어찌나 자주 연착을 하는지 몇시간이 아니라 며칠씩 늦곤 했다는 점은 전혀 다른 나라 이야기 인듯 낯설지만 흥미롭다.

얼마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시 일깨워 준 것처럼 북한과 우리는 한 언어를 쓰는 한 형제다. 하지만 우리는 북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저자의 지적대로 북한 땅은 한번도 밟아본 적 없으면서 오직 여러 회의를 통해 얻은 정보로 연명하는 북한 정보업계 종사자, 정권에 개입하려는 친북 압력단체, 북한 주민들을 개성없고 가난한 '자동인형'으로 묘사하는 북한 정세 전문가들을 통해 왜곡되고 편협한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분명 문제다. 매번 전쟁, 가난으로 설명되던 북한이 이 책을 통해 풍족하지 않지만 성실하고 무뚝뚝하지만 배려심 깊은 모습을 세상에 알렸다는 점이 내심 반갑다. 최진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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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7일 평양에서 정전협정 체결 61주년 기념 불꽃놀이를 시민들이 구경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7일 평양에서 정전협정 체결 61주년 기념 불꽃놀이를 시민들이 구경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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