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슈테판 볼만 지음·김세나 옮김·이봄·302쪽·1만5800원

왼쪽부터 체첸분쟁의 참상과 진실을 고발하다 살해당한 저널리스트 안나 폴릿콥스카야, 버마(미얀마)의 민주화를 이끈 아웅 산 수 치, 페미니즘의 고전적 저서인 `제2의 성`을 쓴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침팬지 연구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   사진=이봄제공
왼쪽부터 체첸분쟁의 참상과 진실을 고발하다 살해당한 저널리스트 안나 폴릿콥스카야, 버마(미얀마)의 민주화를 이끈 아웅 산 수 치, 페미니즘의 고전적 저서인 `제2의 성`을 쓴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침팬지 연구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 사진=이봄제공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를 "기자와 했던 인터뷰 중 가장 큰 재앙"이었다고 표현했다. 팔라치는 키신저가 인터뷰 중에 베트남 전쟁이 쓸데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자백하게 만들어 결국 정치가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세계에서 `가장 센` 인터뷰 기자였다.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이란혁명을 이끈 아야톨라 호메이니, 중국 주석 덩샤오핑 등 당대에 가장 힘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들을 인터뷰했다. 그러나 팔라치는 권력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특유의 개방적 태도와 세련된 공격으로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고 권력의 민낯을 드러냈다. 거물들 앞에서도 결코 주눅 드는 일이 없었던 그녀는 작은 체구와 부드러운 머리카락, 신비로운 회청색의 눈동자를 지닌 여자였다. 여성은 남성과의 차이 때문에 차별을 감내해야 했던 역사를 살아왔지만 오리아나 팔라치는 차이를 차별을 불식시킬 도구로 역전시킬 줄 아는 똑똑한 여자였다.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오리아나 팔라치처럼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깨고 세상에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각인시킨 여성 22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과 독서라는 주제에 천착해 글을 써온 저자 슈테판 볼만은 독문학, 연극학, 역사, 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뮌헨에서 강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책의 첫번째 장은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체첸분쟁의 진실을 밝히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고발을 멈추지 않았던 저널리스트 안나 폴릿콥스카야, 환경·반전·빈곤문제 등에 대해 목소리를 내온 인도의 유명작가 아룬다티 로이 등 사회 전면에 나서 부조리와 불합리를 폭로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2장에서는 버마의 민주화를 이끈 아웅 산 수 치와 독일연방 최초의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 등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정치의 가장 높은 권력을 손에 쥔 여성들을 조명했다. 3장에서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전후 여성운동의 성경`으로 불리는 `제2의 성`을 쓴 시몬 드 보부아르 등 세계대전 후 등장한 위대한 사상가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물리학자 마리 퀴리와 리제 마이트너, 생물학자이자 작가인 레이첼 카슨 등의 학문적 성과를 짚어봄으로써 `여성은 선천적으로 남성에 비해 학문적 지식능력이 떨어진다`는 세간의 편견을 걷어낸다.

저자가 이 22명의 삶에 완벽성을 부여하거나 무조건적인 찬양을 보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책에 소개된 정치인들과 관련해서는 약자들의 고통에 침묵하거나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우위에 두는 행동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전하기도 한다.

이 `특출난 여성들`의 개인적 성취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대다수 여성들의 발목을 잡는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에서 소개된 여성들의 성과와 업적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견주어 부각되는 것은 아직 우리시대 여성들이 그 만큼의 성과를 내기에 쉽지 않은 토양에 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한국에서도 여성대통령과 정치인, 기업인의 탄생이 주목받는 것은 이 땅에선 아직도 여성이 정치인이 되고 기업인이 된다는 것이 `특출난 사건`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웅의 시련이 가혹할수록 영웅담은 더 감동적인 법이다. 현실에서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영웅을 만드는 시련이 되기도 했다. 생각하는 여자의 위험성과 위대함을 알리는 작업이 한 두 사람의 `여성영웅`을 조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여성들이 영웅을 꿈꾸는 자극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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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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