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떤 총리 후보자의 과거 발언 문제로 함석헌 선생이 새삼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씨알의 소리'를 꺼내 읽었다. 그러다가 문득 함석헌 선생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싶었다. 함 선생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에 있었는데, 2006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였다는 것을 최근 인터넷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대전 유성에서 차를 몰고 동학사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갑하산이 높이 솟아 있고, 왼쪽으로는 도덕봉이 있다. 그 사이로 계룡산의 저 멀리 장군봉과 천황봉이 꿈틀거리는 산줄기를 보이며, 왼편으로 툭 터진 곳이 현충원이다. 현충원의 민원실에 가서 함석헌 선생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싶다고 하니 안내하는 분이 현충원 약도 위에 묘소를 찾아가는 길과 묘소 번호도 알려주었다. 애국지사 3묘역의 329번이었다.

빽빽이 들어선 병사묘역을 지나 애국지사묘소라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서 묘소 번호를 차례대로 읽으며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더운 한여름 오후의 불볕더위라 참배객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갑하산을 병풍으로 하고 널찍하게 자리 잡은 현충원의 묘역에는 수많은 묘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우리나라가 그나마 이렇게라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여기 묻힌 애국지사들의 자기희생 덕분일 것이라는 생각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수많은 애국지사 묘와 묘비가 일정한 간격으로 잘 정돈되어 있는 그 사이에 함 선생의 묘도 그렇게 획일화된 크기와 모습으로 있었다. '애국지사 함석헌의 묘'라는 묘석의 뒷면에는 '1901년 3월 13일 용천에서 출생, 1989년 2월 4일 서울에서 서거'라고 되어 있었다. 최근에 유가족이나 추모객들이 다녀갔는지 하얀 국화가 조금 시든 채 놓여 있었다.

묘석의 하단에는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 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라고 검은 옥석에 한글 고체로 반듯하게 쓰여 있다.

조용히 머리 숙이고 묵념을 하고,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소리'라는 시를 가만히 읊조리니 사뭇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함석헌 선생이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다시 돌아와 아직 통일도 못 하고 있는 이 나라의 '씨알'과 정치인들을 향해 사나운 소리로 꾸짖을 것 같았다. 또한, 천안함 배 속에서 고혼이 된 젊은이들과 세월호 배 안에서 꽃도 못 피우고 죽어간 어린 학생들이 무한으로 가면서 외치는 '살갗 찢는 아픈 소리'를 미리 예견한 것 같아 숙연해졌다.

이 시에서 말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 소리'는 함석헌 선생이 수차례 옥살이를 하면서 들었던 그 소리였을 것이다. 특히 함석헌 선생이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게재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면서 겪고 들었던 '살갗 찢는 아픈 소리'들이 시로 승화된 것일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살았던 함석헌 선생께 아주 잘 어울리는 묘석의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석헌 선생의 함자 앞에는 위대한 사상가, 재야인사, 언론인, 시인, 민권운동가, 저항가, 문필가, 종교인 등 많은 수사가 붙는다. 함석헌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독재정권 시대를 살면서 3·1운동, 8·15광복,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를 직접 몸으로 겪으며 살아오셨다. 그러므로 항상 '씨알' 즉 민중의 편에서 권력과 싸우면서 글로써, 강연으로 바른 소리를 외치던 민권운동가의 그 모습이 나에겐 가장 익숙하다.

'국가란 이름 아래 나라를 도둑질해 가지고 있는 소수의 지배자'를 향해 흰 수염을 휘날리며 사자후를 토하던 그 소리가 바로 '빈 들에 외치는 소리'일 것이다. 혁명군의 서슬이 시퍼렇던 5·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사상계'의 11월호에 "신문이나 래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 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하며 5·16쿠데타를 주도한 군인들을 꾸짖으며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열변을 토한 그 '씨알의 소리'일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 말하는 '씨알'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시대가 되면 그때는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긴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나타나리라.

이규금 목원대학교 금융보험 부동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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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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